
00
정오가 넘어가자 햇살의 미지근함이 온 사방을 채웠다. 밝은 빛에 푸른 나뭇잎이 더 진하게 파릇거렸고, 장미는 더 붉게 물들었다. 연한 산들바람에 못다 핀 꽃봉오리들은 고갯짓을 했다. 민호는 가만 그들을 들여다 보다가 활짝 핀 꽃의 잎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찢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살살. 이번 여름에도 참 어여쁘게 피었다.
가득 채워온 물뿌리개로 땅을 촉촉하게 물들였다. 풍성한 꽃밭에 가득, 빈 곳 없이 뿌리자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두 손으로 들어야 했던 무거운 것이 바람에 날아갈 만큼 가벼워졌다. 민호는 땅에 잠시 내려두고 숙였던 허리를 폈다. 광활한 풍경이 그를 반기고 있었다. 이 마을에는 주민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러니 챙이 큰밀짚모자를 들어 올려 하늘을 보아도 막힘이 없었다. 띄엄띄엄 푸른 지붕의 집과 하얀 지붕의 집들이 알갱이처럼 콕콕 박혀 있다. 가만히 고개를 들고 있으니 작은 바람이 느껴졌다. 이마에 흐르던 땀이 말라갔다. 민호는 눈을 지그시 감고 잠시 시원함을 만끽했다. 나뭇가지들이 서걱서걱 부딪히는 소리와 풀잎들이 땅에 기대었다가 일어서는 소리가 들려왔다. 새의 날갯짓과 나뭇잎들이 촉촉이 부딪히는 소리. 초여름이다. 크게 들이마시는 숨에도 계절이 느껴졌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떴다. 눈을 깊숙이 파고들었던 속눈썹이 때졌다. 그곳에는 여전히 광활한 하늘과 듬성듬성 지붕이 보이는 풍경과 한 소년이 있었다.
민호는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그 소년을 더 자세히 보기 위함이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이곳에서 너무 오래 살아서 과거의 인연을 잊은 것일까. 민호는 모종삽을 한 손에 꼭 쥐고 그에게로 걸어갔다.
“…누구세요?”
민호는 소년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위해를 하려 찾아온 방문객일까, 아니면 감찰을 하러 온 수호인일까. 어느 하나 쉬운 후보가 없다. 그러나 소년은 어떠한 목적을 갖고 있다기에 남루한 행색이었다. 부랑자처럼 해진 옷을 입고 있었고 숯 껌댕이를 묻힌 듯 고생의 흔적이 온몸에 담겨있었다. 꽃으로 비유를 하자면 바닥에 내쳐진 백장미를 닮아 있었다. 예쁘고 처연했다.
소년은 질문에도 대답 없이 웃기만 했다. 부드러운 입술의 호선이었다. 혹시 듣지 못하는 걸까. 민호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다시 입술을 뗐다. 그리고 그때 소년의 눈이 스르르 감겼고 민호에게로 쏠렸다. 민호는 재빨리 한 발을 뒤로 빼내 넘어지지 않고 소년을 안았다. 어깨에 얼굴을 묻은 소년의 작은 숨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생명의 증거는 따뜻했다.
순정한 천사
01
지도에 담기지 않은 나라가 있다. 세계수의 결계가 처져 있기 때문에, 양피지를 들고 다니며 전 세계를 여행하는 모험자라도 발을 들일 수 없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방문할 기회조차 없다, 세간에서는 뾰족한 귀를 달고 세기가 지나도록 젊음을 유지하며 자연과 더불어 사는 여기 주민들을 엘프 또는 요정이라고 칭한다고 알려져 있다. 자연의 정기와 수호를 받으며 살아가는 나라, 여기는 청(淸)이다.
청은 총 세 가지 구역으로 나뉜다. 세계수를 중심축으로 하여 가장 가까이에 있는 구역을 ‘뿌리’, 두 번째로 가까운 반경의 구역을 ‘가지’, 마지막으로 가장 먼 반경의 구역을 ‘이파리’라고 부른다. 청에서는 이 구역이 굉장히 중요하다. 어디에서 태어나 사는지에 따라 수명이 좌지우지되기 때문이다.
바깥 사람들은 요정이나 엘프와 같은 단어로 부르지만, 이곳 사람들은 서로를 수호인이라고 부른다. 세계수의 보호 아래서 사는 동시에 세계수에 위해를 가하는 이들을 처단하는 숙명을 갖고 태어났다는 뜻이다. 수호인들은 세계수가 내뿜는 정기를 양분으로 삼아 생을 이어간다. 정기는 포자처럼 퍼지기 때문에 구역별로 밀도가 다르다. 세계수와 가장 먼 국경에는 외부인의 출입을 차단하기 위해 강력한 결계가 펼쳐지지만, 이파리 구역은 영생을 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정기가 분포한다. 그러므로 뿌리의 수호인은 영생을 살아도 이파리 내에서 산다면 대부분 500년을 넘기기 힘들다.
이 불합리함에 대해 반발을 하는 이는 없다. 자연은 하나의 원인으로 결과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물망처럼 촘촘히 연결되어 변동하고 지속된다. 모든 현상과 상황은 거대한 힘에 따른 결과이므로 개인이 거스를 수 없기 때문이다. 민호도 이에 대해 동의한다. 영생이 전혀 부럽지 않다.
민호는 자고 나기를 이파리에서 살아왔다. 뿌리에 소속되어 받을 수 있는 혜택을 질투하기보다 지극히 평화로운 이 권태로운 삶에서 결말만을 기다리고 있다. 나름 나쁘지 않은 생활이다. 꽃을 피우면 어여쁘다는 씨앗을 사와 가꾸고 한 송이씩 화분에 담아 주말에 열리는 장터에 나가 팔고, 또 씨앗을 사와 심고. 일하기 싫은 날에는 언덕에 올라 해가 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본다. 그렇게 매일이 지난다. 너무나 평탄하여 기다리는 죽음마저 고통 없이 자다가 지나갈 듯하다. 세계수의 품에 안길 때야 죽었다는 자각이 들지 않을까, 라는 둔감한 생각도 했다.
그러니까 이런 이상하고 갑작스러운 사건은 예상해보지도 상상하지도 못했다. 이파리 구역 거주민이 아닌 사람을 만날 줄이야. 민호는 저에게 기댄 채로 쓰러진 소년을 조심스레 안았다. 그리고 조용히 물었다.
“너는… 누구야?”
의식을 잃은 소년은 답이 없다. 어디를 굴렀는지 머리칼에도 듬성듬성 작은 흙 알갱이와 잎사귀가 섞여 있었다. 엉겨 붙은 잎사귀가 바닥에 떨어지도록 손으로 쓸었다. 그리고 천천히 무릎을 꿇어 넘어지지 않도록 나무 기둥에 비스듬히 대었다. 민호는 소년의 이마를 가리고 있는 앞머리를 귀로 넘겨주었다. 감겨있는 눈 아래로 촘촘한 속눈썹이 인형 같았다. 손가락으로 가지런히 난 속눈썹을 매만졌다. 거칠한 흙투성이를 쓸자 매끄러운 피부가 만져졌다.
어디서 온 걸까. 얼굴을 보아도 동양계의 사람인지, 서양계의 사람인지 잘 분간이 가지 않았다. 아까 눈동자가 갈색이었으니 동양일까. 그리고 어떻게 들어왔을까. 탈주자의 후손이라도 되는 걸까. 결계는 피에 쉽게 속으니까. 아니면 결계에 구멍이라도 생겨서 그 틈으로 들어온 걸까. 소년이 입을 열어야 알 수 있는 수수께끼들이었다.
이방인을 목격한 수호인은 가까운 언덕의 꼭대기에 놓인 봉화에 가서 빛을 밝혀야 했다. 그런데 신고는 귀찮고 포상에도 관심이 없었다. 자연사만 바라는 수호인으로 살아온 인생에 명예욕 따위 생겼을 리가. 민호는 햇빛을 받는 소년의 얼굴을 보다가 등을 돌려 소년을 업었다. 적적한 집구석에 꽃과 어울리는 인형 하나쯤 생기면 좋으니까. 씻기고 말끔한 옷으로 갈아입히기만 하면 얼추 태가 날 수 있을 터다.
02
민호는 침대 위에 소년을 가지런히 눕히고 물을 가득 담은 그릇과 작은 천을 가지고 왔다. 간단히 청결 마법을 사용하면 될 일이었는데, 이상하게 소년에게는 마법이 들지 않았다. 다른 마법을 시도해도 마찬가지였다. 민호는 물건들은 협탁에 올려두고 일어서 소년의 셔츠를 벗겨내었다. 묶인 매듭을 풀고 실을 하나하나 빼었다. 셔츠 사이로 드러난 가슴팍은 소년의 숨을 따라 부풀었다가 납작해졌다. 소매 단추도 풀어 팔을 빼내었다. 하의는 상의보다 벗기기 쉬웠다. 벨트를 풀고 바지를 벗겨내고 하얀 속옷을 밀어 내렸다. 소년은 나체가 되어 곤히 누워있었다. 민호는 천에 물을 적시고 낡은 오르골을 손질하듯이 소년의 몸을 닦았다. 흙 알갱이가 낀 손끝과 긴 팔근육의 굴곡, 부드러운 팔 안쪽, 움푹 들어간 빗장뼈, 매끈한 가슴, 허벅지와 한 손에 다 잡히는 얇은 발목.
몸을 문지른 후에는 쓰지 않은 새하얀 천에 물을 적시고 보드러운 볼을 쓸었다. 생채기가 나지 않도록 힘을 빼고 거뭇한 얼룩들을 지웠다. 아무리 문질러도 없어지지 않는 갈색 점들은 그대로 냅두었다. 하얀 침대 위에 나체로 누워있으니 침대가 마치 요람 같았다. 민호는 아기를 본 적이 없음에도 아기를 대한다는 생각으로 억센 손길을 누르며 옷을 갈아입혔다.
제 할 일을 마친 민호는 소년의 빼곡하고 긴 속눈썹을 매만졌다. 한 번 씻기고 나니 소년은 값비싼 인형보다 산뜻하고 고왔다. 해가 떨어질 때까지 소년을 쳐다보다가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려왔다. 민호는 앞치마를 매고 도마와 재료들을 꺼내었다.
당근을 반달 모양으로 총총 썰고, 감자는 네모나게 깍둑썰기, 고기는 큼지막하게 썰어 재료를 준비했다. 혹시 몰라 혼자 먹던 평소보다 양을 늘렸다. 굳힌 소의 기름조각을 꺼내 냄비에 넣고 달궈진 후에 고기부터 넣어 달달 볶았다. 그리고 느리게 익는 순부터 채소들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숨이 죽어 흐물흐물해질 때 우유, 버터를 넣고 장터에서 사 온 향신료를 집어넣었다. 수프가 보글보글 끓었다. 그리고 국자에 가득 퍼 그릇에 옮겨 간단한 식사를 했다.
저녁을 먹고 난 후에는 흔들의자에 앉아 괴담 소설을 읽었다. 섬찟한 공포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수호하는 고리타분한 영웅소설보다 수 배는 취향에 맞아서 항상 지하서점에 가게 된다. 학교라는 곳에 가본 적이 없어서 모르지만, 각종 원한이 생겨나는 기이한 곳임에 틀림없었다. 한 챕터를 다 읽자 졸음이 몰려왔다. 민호는 소년이 누워있는 침대로 가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평소보다 침대가 절반으로 줄어들고, 배게도 절반이고, 쓸 수 있는 이불도 절반이었지만, 따뜻했다.
03
하루 내내 깨어나지 않던 소년은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일어났다. 낯선 곳에 내내 시선을 두리번거리던 눈이 베개에 팔을 세우고 소년을 내내 쳐다보고 있던 민호의 눈과 마주쳤다. 진한 갈색 눈이 유리구슬처럼 맑았다.
“일어났네.”
소년은 이불 속에 폭 얼굴을 숨기고 눈만 빼꼼 꺼내어 쳐다보았다. 그리고 순진무구한 말투로 민호에게 물었다.
“여기는 어디예요?”
“내 집.”
“우리는 사귀는 거예요?”
지나치게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사귀는 사이. 고로 연인 사이를 뜻하는 말. 사전적 정의는 알고 있었지만, 바깥 세계와 달리 여기에서는 그런 개념이 없다. 모든 감정은 세계수의 수호에서 비롯되니까. 개인 사이의 감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우리는 안 사귀는데.”
“그럼 왜 같은 침대?”
“침대가 하나밖에 없어서. 이제 내가 질문할래. 여기에 어떻게 들어왔어?”
“몰라. 기억이 안 나. 지금 내 이름밖에 기억 안 나.”
이래서야 묻고 싶었던 질문이 남아나질 않았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가만 쳐다보니 소년은 제 이름을 말해주었다. 용복이라고 했다. 이용복. 행복과 닮은 이용복.
식탁에 앉히고 어제 끓여둔 수프를 그릇에 가득 담아 내어주었다. 다리를 뻗으려고 사두었던 여분의 의자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어제 한 입도 안 먹고 내내 자서 그런가, 용복은 아주 잘 먹었다. 민호는 용복이 첫입을 뜨는 모습을 지켜보고 숟가락을 들었다.
“나는 밥 먹고 일하러 나가.”
“무슨 일 하는데?”
“꽃을 심어서 키우는 일. 그리고 화분에 담아서 장터에서 팔아.”
“나도 가면 안 돼?”
“안 돼. 잡혀 가.”
민호는 용복에게 여기서 사는 주의점을 알려주었다. 혼자서는 절대 밖으로 나가지 말 것. 용복은 ‘청(淸)’이라는 나라에 대해 무지했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이 제 이름밖에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청에서는 용복처럼 낯선 사람을 보이면 감찰사로 끌려가서 무서운 심문을 받아야 한다는 말로 겁을 주었다. 용복은 그 말에 지레 겁먹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왜?”
“여기서는 수호인만 살 수 있어. 세계수를 수호하는 사람만 그 혜택을 받을 수 있으니까.”
“그럼 영원히 집에 있어야 해?”
“해가 뜨지 않을 때는 나가도 괜찮아. 그때는 저주받는 시간이라 아무도 밖에 나가지 않거든.”
“진짜 괜찮은 거야?”
“나갔는데 멀쩡하던데. 분명 달빛을 맞으면 저주를 받는다고 했는데, 특이체질인가 봐.”
“그럼 나 해 보러 가고 싶어. 새벽에 나가자.”
용복은 식탁 위로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하듯 주먹을 감싸 쥐니, 그것이 아니라
고 했다. 새끼손가락끼리 연결 지으란다. 도저히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서 새끼손
가락을 내미니 제 새끼손가락에 새끼손가락을 끼웠다.
“약속!”
04
푸른 잔디 언덕을 가르는 돌담길을 따라간다. 그러면 렌치 씨가 키우는 작은 닭 농장과 텃밭이 보인다. 빨간 지붕의 낡은 집도 보인다. 셀 수 없는 날 동안 이곳에 살아왔지만, 장터가 열리는 날을 제외하고는 렌치 씨를 본 적이 없다. 그의 머리칼이 풀 같은 녹색이어서 그럴까. 말도 섞은 적이 드물다. 가격에 적혀있는 대로 동전을 내고 물건을 가져오니까. 렌치 씨의 손이 한 번에 달걀을 두 개를 가뿐히 쥘 수 있는 만큼 큰 사실만 알고 있다. 오늘도 농장에는 렌치 씨가 보이지 않았다.
돌담길이 갈라지는 곳에서 오른쪽으로 향한다. 그리고 속으로 숫자 100을 세고 걸어가면 평지에 도착한다. 마을의 입구와 가장 가까운 광활한 이곳에 민호의 꽃밭이 있다. 안개꽃처럼 꽃봉오리가 손톱만 한 작은 꽃들을 키웠다가, 이번에는 주먹만한 장미들을 심어 키웠다. 눈에 보이는 사방이 장미로 가득하다. 주황색, 하얀색, 붉은색. 선명한 빛깔들이 햇살에 찬란히 빛난다.
민호는 울타리 가장 앞에 놓인 장미를 손으로 부드럽게 감싸 장미의 정면을 내려보았다. 장미의 하얗고 뽀얀 색이 집에 있는 용복을 생각나게 만들었다. 생기가 넘치는 걸 보니 아주 잘 자라고 있다. 그리고는 본격적으로 챙이 큰 밀짚모자를 쓰고 신을 바꿔 신었다. 쭈그려 앉아 잡초를 뽑고 꽃들한테 말을 걸다가 햇볕이 진한 정오가 되면 물뿌리개와 양동이를 챙겨 그늘이 진 시냇물에 바지를 걷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무더운 여름에 찬 물에 발을 담그고 있기는 아무리 반복적인 일상의 조각이라도 즐거운 일이었다. 작게 첨벙첨벙 발장구를 치다가 더위가 가시면 잠시 누워 낮잠을 잤다. 팔로 저녁을 만들어 잠깐 꿈나라를 여행을 다녀오면 상쾌하게 일어날 수 있다. 오싹한 악몽이면 비몽사몽하지 않고 잠이 확실하게 깬다. 그리고 물뿌리개와 양동이에 물을 담고 다시 꽃밭으로 향한다. 물을 뿌리고 활짝 핀 꽃들은 뽑아 가져온 화분에 담는다. 꽃밭 옆으로 가지런히 줄을 세워둔다. 오늘은 빈손으로 돌아가지 않고 하얀 장미를 챙겨 안았다. 닮은 꽃을 보면 좋아할 것 같다.
민호는 모자를 울타리 기둥에 걸어두고 신을 바꾸어 신었다. 흙이 묻은 작업화를 탈탈 털었다. 언덕 너머에는 비스듬히 해가 기대고 있었다. 곧 저녁이다. 배에서 또 꼬르륵 소리가 났다. 화분을 안고 언덕을 넘었다.
05
“잘 다녀왔어.”
화분을 문 앞에 놔두고 문을 열기 전에 문이 열렸다. 용복이 환한 얼굴로 민호를 마중 나왔다. 놀란 커다란 눈으로 끔뻑끔뻑 바보처럼 용복을 쳐다보다가 민호는 내려둔 화분을 안아 용복에게 건넸다.
“선물. 내일 숲에 가니까 맛보기.”
이유는 모르겠지만 얼굴에 열이 올랐다. 오늘 태양 빛이 평소보다 셌던 모양이었다. 화끈화끈거린다.
“고마워.”
얼굴이 더 뜨거워진다. 손을 볼에 대자 감기에 걸려 고생했을 때처럼 열이 나고 있었다. 작업시간을 다시 줄일 필요가 있는 모양이다.
겉옷을 벗고 저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앞치마를 꺼내입고 재료들을 꺼내었다. 오늘은 채소 달걀부침이다. 양파와 당근은 잘게 다지고, 브로콜리는 4등분으로 잘라준다. 호박은 가늘게 채를 썬다. 당근을 먼저 넣고 볶다가 양파를 넣고 브로콜리와 함께 볶다가, 마지막으로 호박을 넣어준다. 고소한 냄새가 솔솔 나기 시작했다.
“맛있겠다.”
용복이 등에 달라붙어 어깨 너머로 코를 킁킁댔다. 허리에 둘러진 팔이 느껴졌다. 앞치마를 쥔 작은 손이 꼬물꼬물. 실실 웃음이 났다. 민호는 용복이 옆으로 나란히 놔둔 그릇에 볶음을 덜고 계란 두 개를 풀어 고슬고슬한 계란으로 그 위를 덮었다. 예쁘게 빵을 갈라 한 편에 두고, 간단히 만든 소스를 뿌렸다.
“이제 먹을까?”
“잘 먹겠습니다.”
크게 한 수저를 떠 오물오물. 맛있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주 소중한 하얀 장미가 생긴 기분이었다. 이름도 있고, 대화도 할 수 있고, 무엇보다 집에 돌아오는 것이 기뻤다.
06
평소보다 일찍 눈을 떴다. 용복은 아직 꿈나라를 여행 중이었다. 민호는 가만 눈만 떠서 몸을 돌려 용복을 바라보았다. 유리구슬처럼 맑은 눈이 덮여있지만, 손을 뻗어 더듬더듬 얼굴을 매만졌다. 말랑한 볼을 손가락으로 콕 찔렀다가, 콧날을 따라 매끄럽게 쓸었다가, 별자리처럼 보이는 갈색 점을 문지르기도 했다.
“용복아, 우리 해 보러 가기로 했잖아.”
눈에 띄지 않으려면 밤의 저주 받는 달빛을 맞는 수밖에 없었다. 운이 좋게 저주에 안 받는 특이체질로 태어났으니 다행이었다. 용복도 수호인이 아닌 이방인이니 저주를 받지 않을 것이다. 밤의 저주는 세계수의 수호를 게을리한 수호인들에게 내려지는 단죄니까. 용복이 손으로 눈가를 비비며 천천히 눈을 떴다.
잠옷에서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돗자리와 바구니를 챙겼다. 바구니에는 물이 든 유리병과 빵을 챙겼다. 용복에게는 혹시 모르니 망토를 입혔다. 어두운 밤에 그림자로 오해받을 수 있도록 하는 시꺼먼 망토. 모자까지 씌우니 전신을 덮었다.
“문 밖으로 손 내밀어 봐.”
용복이 문 너머로 손을 내밀었다. 새하얀 달빛을 받아도 저주가 내려지지 않았다. 역시 이방인이 확실한 모양이다. 민호는 달빛을 쬐는 하얀 손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그리고 자연스레 손가락 사이로 손가락을 끼워 넣었다. 어제 갔던 방향과 반대로 돌담길을 걸었다. 마을이 없는 숲속으로 향한다.
수호인들은 결계가 있는 숲속에 들어가는 일을 꺼려했다. 결계에 가까이 간다는 행위 자체가 세계수의 힘을 의심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민호는 그런 불경스러운 마음은 없었다. 단지 사람들의 눈을 피하고 싶었을 뿐이다. 빽빽한 숲을 뚫고 걸어가자 곧 시냇물이 흐르는 모습이 보였다. 이 물이 흐르고 흘러 아마 꽃밭이 있는 그곳까지 닿고 있는 것이겠지. 잠이 오지 않았을 때 만들어둔 징검다리를 지나고 작은 바위계단을 올라 탁 트이는 정원 같은 곳에 도착했다.
하얀 달빛에 꽃들은 푸르게 빛이 났고, 낮에 자고 있던 야행을 즐기는 동물들이 기어 나와 활기찬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 밤에는 무성한 별들이 어둠을 몰아낸다. 낮보다 차가운 밤공기가 가볍게 머리칼을 흐트러뜨렸다.
“예쁘다.”
민호는 감탄하는 용복의 옆으로 챙겨 온 돗자리를 펼쳤다. 그리고 바구니를 한켠에 올려두고 용복과 나란히 앉았다. 달빛을 배경으로 손이 겹쳐졌다. 용복이 민호가 기댄 손 위로 제 손을 겹쳤다. 민호가 밤하늘을 보다가 용복에게 고개를 돌렸다. 매끄러운 곡선은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신기하게 눈은 더욱 반짝였다.
“해가 왜 보고 싶었어?”
“모르겠어. 그냥. 이끌림. 민호는 언제 밤에 나와도 저주가 안 받는 걸 알았어? 여기
사람들은 다 저주에 걸릴까 봐 못 나온다고 했잖아.”
“어제처럼 일을 갔다 와서 밥을 먹고, 괴담을 읽고 침대에 누웠어. 그런데 어느 날에 갑자기 잠이 오지 않았어. 속으로 아무리 숫자를 세어도 눈이 감기지 않았달까. 그래서 이럴 바에는 저주를 받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싶어서. 그래서 밖으로 나갔어. 무섭지도 않았어. 마치 달빛에 이끌리는 사람처럼 나갔으니까. 그때 처음으로 저주를 받은 사람도 달에 매혹당한 건 아니었을까. 처음으로 본 달이 노란 태양과 다르게 새하얗게 밤을 밝히고 있는 모습이 예뻤어. 한참을 달을 구경하다가 알았어. 내가
저주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신기하지?”
“응, 무척. 그날에는 또 밖에서 뭘 했어?”
“저주를 받지 않는다니 내가 갑자기 특별하게 느껴지는 거야. 그래서 여기 숲으로 들어왔어. 금기를 깨도 어차피 통하지 않는 걸 알았으니까. 그때 깨서 다행이야. 너한테 해를 보여줄 수 있잖아.”
민호와 용복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천천히 밤이 걷히기를 기다렸다. 새벽에 나왔음에도 해를 기다리는 시간은 길었다. 그사이에 작은 들꽃을 엮어 반지를 만들고 화관을 만들어 썼다.
“내가 키우는 꽃밭도 보여주면 좋았을 텐데.”
“한 송이로도 충분해.”
캄캄한 밤이 하얗게 물들기 시작했다. 염색을 하지 않은 천처럼. 이윽고 순백의 하늘이 노랗게 금빛을 피워냈다. 노란빛이 진한 주황빛으로 그리고 붉은색으로. 둥근 해가 슬며시 고개를 들고 다가왔다. 민호는 하루의 시작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용복을 보았다. 눈물이 고여 흐르고 있었다. 해를 담은 용복의 눈이 노란색이었다.
“슬퍼?”
“해가 보고 싶었던 이유가 떠올랐어. 새로운 날이 오기를 간절히 기다렸을 때 해가 너무 반가웠던 거 같아. 다시 해가 떠오르는 장면을 보고 싶어서 달려나갈 만큼.”
용복은 해를 바라보며 말했다. 슬며시 올라간 입꼬리에 민호는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맞추어 해를 보았다. 부드러운 햇살. 새벽 막 일어난 해는 아기 손처럼 부드러웠다.
“생일이면 항상 가족끼리 한방에 모여서 해가 뜰 때까지 카드게임을 하고 놀았어. 깔깔거리면서 웃다가 정말 아침이 밝아오면 베란다에 옹기종기 모여서 이렇게 해를 바라봤어. 눈이 부시도록 행복했어.”
“지금도 같은 해를 보는 거 같아?”
“응, 지금도. 고마워.”
그날을 기점으로 거리는 더욱 가까워졌다. 엉킨 실처럼 한 몸처럼 꼭 껴안고 잤다. 가끔씩 팔이 저려와도 함께 있음에 기뻤다. 설렘과 기대로 세상이 물들었다. 발걸음은 가벼워지고 마음은 만족스러워 마지않았다. 용복은 밤마다 떠오른 과거의 기억을 말해주었다. 대부분 가족과 있던 시간이었다. 탄생과 생일, 여행. 환상적이었다.
어느 날 밤에 드디어 용복이 말했다.
“여기에 온 이유가 기억났어. 더 이상 내일이 궁금하지 않을 때 여기에 오라고 엄마가 말해주었어. 해가 예쁘지 않을 때, 꽃을 보고 웃음 짓지 못할 때, 지켜야 할 것이 없을 때. 그러면 여기에 오는 거랬어. 너를 만나라고 그런 걸까.”
우리의 만남이 운명이라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