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날선 뚜껑에 손끝을 베였다. 통조림 연유 안으로 새빨간 핏방울이 떨어졌다. 툭툭. 툭툭. 이민호는 불순물 섞인 액체를 그대로 머그컵에 부어넣었다. 침 뱉는 것보다야 낫지 뭐. 진한 홍차와 섞여 핏빛은 제 색을 금방 잃었다. 대충 계량한 밀크티를 만든 뒤 티스푼은 싱크대 안에, 반쯤 입을 벌린 연유 캔은 냉장고 안에 처박았다. 이민호는 이 골방 부엌에서 나온 건 절대로 먹거나 마시지 않았다. 꼬라지를 아니까.
컵을 들어올리는데 바깥이 너무 고요했다. 손버릇 나쁜 천훼이는 마작판이 끝나면 패마저도 가만 두질 못하고 짜그르륵 짜그르륵 만져댔다. 이민호, 들어 봐라. 예술이지. 이건 말야. 마른 물 위에서 헤엄치는 소리라고들 한다. 세상이 너무 시끄러워. 나는 딱 두 종류의 소음만을 원해. 패 돌리는 소리. 아니면 남자들이 우는 소리. 그리고는 미친새끼처럼 폭소하곤 했다. 천훼이가 지금 몇 살이더라. 60. 65. 어쩌면 70. 징그러웠다. 크게 웃을 때마다 입안에 해 넣은 금니가 보였다. 이민호는 마작 같은 건 딱 질색이었다. 규칙은 복잡하고 계산은 기분 나쁜 놀이. 시작하려면 여러 명이 필요한 것도 최악. 그런 것보다는 혼자 하는 취미가 좋았다. 왜 스도쿠 같은 거 좋잖아.
오늘 막판에 난 천훼이의 패는 녹일이었다. 족보를 몇 개 모르는 이민호도 아는 흔치 않은 역만. 전부 초록색만을 모은 것. 그래서 흐트러트리지 않고 가만히 감상 중일지도 모르겠다. 패는 거짓말을 안 해. 며칠 내 란타우라도 갈 일이 있겠군. 이민호, 차를 한 잔 타 와. 만족할 때까지 마작 상대로 시달리고 나면 끝은 늘 차 시중이었다.
차를 한 잔 타 와.
그게 유언인 줄은 몰랐다. 쥐 죽은 듯 조용한 이유가 있었다. 쥐 아니고 천훼이가 죽었지만. 바닥이 피투성이라 눈깔 아팠다. 마지막에 시선 둘 곳은 테이블 위 얌전히 일렬로 놓인 마작패 뿐이었다. 푸른 대나무 일색은 무언가의 보색이라는 거군. 패는 거짓말을 안 한다고. 그거 참 상징적이네. 오늘은 겨우 셋을 모아 3인 마작을 했다. 한 명이 더 있었다.
“나도 주세요. 밀크티.”
살인범은 기어코 이민호에게 말을 건다. 먹지 마, 안 좋은 게 들었어. 이민호는 그렇게만 속삭였다.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없이
어색한 상대와 밥 먹으러 왔다. 마작판에 네 시간이나 붙잡혀 있었다니. 반찬이라기보다 술안주에 가까운 메뉴를 앞에 둔 채 심야 좌판에 앉았다. 부엌 행주로 대충 문질러 닦은 일행 꼴을 보곤 상인이 반색했다.
“필릭스, 천 어른은 잘 계시지?”
“응. 왜.”
“무슨 일 있나 했지. 행색이 험해서. 넌 그런 일은 안 하잖아.”
아하. 참견 좋아하는 애새끼다. ‘그런 일’ 이라고 아는 척 하는 게 즐거워 보였다. 뒷골목 집단에 호기심이 있어서 푸드트럭 같은 건 때려치고 어디 조직에라도 들어가고 싶겠지. 가진 거에 감사할 줄 모르고. 살인범은 저런 인종이 만족할 만한 뻔뻔스러운 답을 건넸다.
“별로 위험한 건은 아니었어. 그냥 닭을 몇 마리 잡아서 그래.”
“닭? 먹으려고?”
“아니. 거기 약을 넣어뒀거든.”
비닐에 싸서. 여러 군데에 말야. 필릭스는 조그만 손가락을 뻗어 남자의 배 위를 꾸우욱 찔렀다. 새하얘진 상대가 우, 우와. 그러니까. ‘그 약’을, 말하는 거지? 뱃속에 넣는다니. 그래, 영화에서 본 것 같아. 횡설수설했다. 제트, 맥주는 여기 놓고 이제 꺼져. 더 들어서 좋을 거 없어. 필릭스가 그야말로 느와르물 주인공처럼 속삭였다. 개씹구라를⋯. 남자는 결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뒤돌다가,
“제트! 그냥 이거 포장해 줘. 갈래.”
필릭스의 부름에 제자리에서 한 바퀴를 회전했다. 그래. 어서 돌아가서 씻는 게 좋겠어. 레몬 많이 넣어 줄게. 그는 또 알은체하고 자리를 떴다.
“어딜 가는데?”
“외식을 한 번도 안 했어요? 제트는 두 번 이상 본 사람한테 무조건 친한 척 하는데. 형 이름도 모르는 것 같아요.”
“맥줏집은 잘 안 다녀. 다른 술을 더 좋아해. 돌아가게? 살인현장으로?”
“우웩. 나도 맥주 안 마시는데. 그쪽 주려고 산 건데. 환불할래.”
“됐어. 있으면 마셔. 어딜 갈 거냐니까.”
“몰라요. 화장실 있는 장소요.”
닭꼬치 시켰는데 꼬꼬닭 가르는 얘기 하니까 토할 것 같거든요⋯⋯. 필릭스가 앞쪽으로 넘어온 옆머리를 배배 꼬았다. 칼춤 출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속이 안 좋다니.
“너 자수할 거냐.”
“⋯⋯.”
“세수 한 번 하고 자수할 생각이잖아.”
“⋯⋯.”
“하지 마.”
필릭스의 입이 벌어졌다. 우와아.
“왜요? 형 누군데요? 뭔데 나한테 하라 마라?”
반항이라곤 살면서 한 번도 안 해본 것 같은 말투로 뻗댔다. 참 나.
“표면상 증인도 있잖아. 저기, 제트. 너는 오늘 저녁에 꼬꼬닭하고 있었어.”
“뭔 소린지 모르겠어요.”
“나 지금 너 숨겨주는 거 아니야. 살인방조로 나까지 끌고들어갈까 봐 걱정하는 것 같은데.”
“뭔 소린지 모르겠어요.”
“너 관용이라는 말 모르냐.”
“알아.”
“그 소리.”
“뭔 소린지 모르겠어요.”
오지랖 점원이 포장된 고기를 든 채 가까워지고 있었다. 필릭스는 일부러 볼륨을 높(이는 것 같아보)였다.
“아저씨 나 따먹고 싶어서 이래요?”
이민호는 본토부터 마카오까지 이 바닥에서 구른 지 몇 년째였다. 자주 안 써서 그런지 광동어 말투가 더럽게 철없이 들리는 남자애쯤이야. 더 높였다.
“어. 너 따먹고 싶어.”
제트라는 이름의 노점 직원은 오늘 처음으로 손님 대화에 끼어들지 않고 급하게 돌아갔다.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로⋯⋯.
룸 넘버 701
⋯⋯있어야 할 자리라는 건 어디일까. 내게 맞는 자리.
필릭스는 낯선 건물의 7층에서 골몰했다. 그리고 저새끼는 도대체 뭔가. 이게 날 숨겨주는 게 아니면 뭔가. 뭔가. 뭔가. 평생동안 ‘진짜 일상’을 유예하며 지냈다. 어른이 되면, 돈을 모으면, 천훼이 밑에서 나가면, 그 때 정말로 나의 뭔가가 시작되는 거야.
새 시작은 없었다. 매 순간이 실제 삶이었다. 어쨌든 생 아닌 사를 각오했는데 그 부분이 밀려버린 경험은 처음이다. 낡은 호텔방에서 씻기 전 새 쓰레기봉투에 입었던 옷을 쑤셔넣었다. 증거인멸이 아닌 증거보관용이다. 목 위로 칼 떨어지기만 기다렸는데 저만 놔두고 다들 저벅저벅 나간 거 같은 기분이었다. 저기요. 왜 안 끝나요? 이거 언제 끝나요? 그리고 사형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보스를 찔러버리고 평생 속죄하기로 마음먹었다. 일 년 전부터 계획한 일이다. 아니지. 삼 년. 아냐. 팔 년은⋯⋯. 사람을 죽였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해도 되나. 내가 평소에 쓰던 말을 마구잡이로 떠올려도 되나? 착한 사람들이랑 똑같은 숫자로 수를 세도 되나? 뜬금없이 지금에서야 눈물이 흘렀다. 망상을 너무 좋아한다고, 천훼이가 항상 놀렸었다. 바깥에서 관음하기에는 꽤 즐거운 취미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필릭스에게 없는 일을 상상하는 건 거의 중독증세였다. 가끔 얻어 피우는 대마보다도 몸에 좋지 않았다.
울음이 안 멈췄다. 혼자 있고 싶지 않았다. 몸 닦고 나왔는데 망설여졌다. 옷이 필요했다. 반드시. 어쩔 수 없이 쓰레기봉투를 다시 뒤졌다. 끔찍하게 역한 냄새가 났다. 티셔츠와 팬티 차림으로 옆방 문을 두드렸다. 훌 똑 쩍 똑 훌 똑 쩍 똑 훌 똑 쩍 똑. 똑. 똑. 고르고 고른 목격자였다. 기준은 하나. 상식적일 것. 천훼이 주변의 인간들은 다 어딘가 나사 빠져 있으니까. 심지어 거리의 제트마저도. 과하게 그를 증오해서 살인을 덮어주거나. 반대로 칭송해 밑을 기고 싶어하지 않아서. 외부인에게 본 것 그대로를 말해줄 사람. 한두 달 전부터 천훼이가 자주 만났고 리노라고 불렀던 사람. 비서인지 쫄따구인지 보디가드인지 돈세탁 업자인지 모를. 문이 열렸다. 아. 또다. 왜 이 장면을 어디서 본 것 같지? 필릭스는 망상이 심한 만큼 데자뷰라는 착각에도 자주 시달렸다.
“왜 이렇게 늦게 나와. 아저씨.”
필릭스가 훌쩍댔다.
“닭꼬치 데우느라.”
“여긴 전자레인지도 없는데요.”
“직화구이. 라이터로.”
좀 탔어. 그는 필릭스를 보고 놀라지 않았다. 옷이 더러우니까 프론트에 가서 가운을 요청하라나. 종잡을 수 없었다. 아까 좌판에서 급발진에 맞불 놓듯 던져온 저급한 핑계는 안 믿었다. 느낌뿐이긴 했지만 남자랑은 자 본 적도 잘 생각도 없는 것 같았다.
다행이었다.
일회용 가운은 착용감이 최악이다. 필릭스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바삭바삭 소리가 났다. 종이봉투 안에 담긴 지단자이라도 된 느낌이었다.
“기분 나쁘다.”
망연히 튀어나온 중국어에 남자가 필릭스를 큰 눈으로 빤히 쳐다보더니 물었다. 그게 더 편해?
“아니. 우리는 맨날 광동어로 얘기해. 천훼이 앞에서만 중국어를 쓰고. 근데 가끔 이래.”
“우리, 가 누군데?”
“⋯⋯알 필요 없어.”
“아아. 맥주는 여기 놓고 이제 꺼지라고?”
필릭스는 무슨 개소리냐는 표정이었다.
“네가 말해 놓고도 몰라?”
“그게 내가 한 얘긴가?”
“어.”
“왜 아무 헛소리를 드라마 명대사처럼 기억하고 있어요? 변태같아.”
그래. 변태구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러니까 아까 그걸 보고도 이렇게 평범하게. 갑자기 속에서 뭐가 올라왔다. 욕실로 뛰어갔다. 웩웩대며 다시 울었다. 평소처럼 말하고 먹다가도 누가 바늘로 찌른 것처럼 갑자기 충격에 몸이 떨렸다. 손에 피 묻히고 다니는 사람들은 이걸 어떻게 견디는 걸까. 잡아줄 만한 머리길이도 아닌데 다정한 손이 닿았다. 목덜미의 머리카락 끝을 살살 만져줬다.
“필릭스.”
“⋯⋯.”
“고향이 어디지?”
“⋯⋯홍콩.”
“확신할 수 있어?”
없었다. 필릭스가 일어나 입가를 닦았다.
“일주일 뒤에 컨테이너가 들어와. 콰이칭으로.”
필릭스가 멈칫했다.
“한 번도 꼬리를 못 잡았어. 머리들이 좋잖아. 그렇게 많은 애들을 데려오는데도. 홍콩, 중국, 한국, 일본, 미얀마, 라오스⋯. 여기가 아니라 본토로 포장해 왔다가 몇 명씩 나눠 입국시킬 거라고 생각했어. 그게 아니더군.”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야. 이 문장을 들어본 적 있어? 필릭스가 고개를 저었다. 얼굴이 창백했다.
“딱 일주일이야. 그때까지만 기다려 줘. 돈줄이 죽었다는 걸 알면 홍콩행 배는 안 떠. 천훼이는 죄명도 없는 시체가 될 거야. 그리고 아이들.”
한 번 더 뭐가 필릭스의 속에서 역류했다. 어쩔 수 없는 감각이었다.
“무슨 일 생긴대도 걔들은 어디 또 다른 곳으로 팔려나가겠지. 뿔뿔이 흩어지게 돼. 현장검거에 성공하면 두 박스는 살릴 수 있어. 서른 명. 육지에 닿는 순간 우리가 압류할 거야. ”
“우리, 가 누군데⋯⋯.”
“경무처.”
넌 자수할 필요 없어. 이미 했어. 이민호는 다시 걔의 뒷목을 쓰다듬었다.
룸 넘버 l
이민호는 사실 필릭스가 말하지 못한 우리에 관해 벌써 차고 넘치게 알고 있었다. 천훼이는 벌어들인 돈을 전부 인신매매에 탕진하는 미친새끼였다. 그걸로 재산도 식구도 불려냈다.
이민호는 그 거래 안에서 살아남은 아이였다.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게 뛰었다. 정신 차리니까 대로의 어른들이 참견해서 저를 경찰서로 데려다 놓은 뒤였다.
엄청 덥고 깜깜해서, 한국에서 온 다른 형이 며칠 지나면 딴 나라로 가거나 좋은 집으로 보내 주니까, 가만히 있으면 된다고 했는데, 무서웠는데 밖이 보여서⋯⋯. 와아아아 모두 다 뛰어나갔는데, 몇 명은 잡히고, 그러니까⋯⋯.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때 경찰관이 이민호를 보고 주변에 던진 첫마디는 이런 뜻이었을 거라고 추측한다. 혹시 여기 한국어 할 줄 아는 사람 있나?
이민호의 증언대로는 아무 것도 특정할 수가 없었다. “덥고 깜깜한 곳”도 “밖”도. 특이한 점은 그렇게 많은 사람이 갇혀 있다가 뛰쳐나왔다면서 이민호가 찾아온 곳 주변 어디에도 새로 앵벌이 시작한 어린애처럼 보이는 인간이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이다. 이민호는 금방 알았다. 다들 저와는 반대로 빛을 따라 달렸을 거다. 항구에서 제일 밝은 곳은 바다로 가는 길이니까. 나 말고는 전부 도로 붙잡혔을 거라고.
이민호가 당도한 외국에서 공식적으로 처음 얻은 자격은 난민이었다. 비공식적으로는 국제미아. 세월이 흘러 거꾸로 홍콩 사람들이 대만과 영국으로 떠나갈 때, 이민호는 어른이 되었고 드디어 낯선 나라의 국적을 갖게 되었다. 이제는 태어난 곳이 더 어색했다. 모두가 그를 리노라고 불렀다.
룸 넘버 308
필릭스는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샜다.
“시체를 누가 발견하면 어떡하지?”
“그럴 일은 없어. 아니. 경찰 중 누가 발견하겠지만. 아무튼.”
걱정하지 마. 민호가 단언했다. 확신뿐인 대답에 소름이 돋았다. 필릭스는 정말로 사형 집행일을 받은 상태에 놓인 거나 다름없었지만 차라리 마음이 홀가분했다. 더이상 망령처럼 치미는 역겨움에 갑자기 뛰어가거나 하지 않았다.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유는 분명했다. 옆에 있는 언더커버 경찰관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그가 들려준 일주일 후의 계획 때문에.
체크아웃을 하기 전에 형이 나가서 티셔츠와 바지를 사다 줬다. 한 곳에 계속 있는 건 위험하다고 했다. 늦은 아침으로 둘이서 콘지를 떠먹다가 문득.
“어. 그러고보니 니 속옷, 까먹고 안 샀다.”
“그래서 지금 안 입고 있어요.”
이민호가 우하하하 웃었다. 쇼핑이나 갈까. 그 티셔츠는 근처에서 아무거나 산 건데. 색깔이 별로 안 어울리네.
“내가 고를래.”
필릭스가 눈을 반짝였다. 킬러도, 몸빵 덩치도, 사기꾼도, 노름에 미친 놈도 아닌데 보스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걸 보고 조직원들은 필릭스를 천훼이의 애완이라 칭했다. 쓰레기도 자기 키우는 개 고양이만은 끔찍하게 아낄 때가 있단다. 필릭스 너는 인간이 아닌가 봐. 왜냐하면 천훼이는.
다 자란 인간은 방에서 쫒아내잖아. 필릭스 네가 지금 몇 살이더라. 스물 셋, 넷⋯⋯.
그따위 말을 농담이랍시고⋯⋯. 난 그새끼랑 한번도 안 잤어. 뭘 상상하는 거야.
그럼. 알지. 그러니까 애완이라구.
⋯⋯.
이름도 기억 안 나는 누군가에게 들은 그 말이 필릭스를 영원히 옭아맸다. 그렇구나. 나는 애완이네. 하지만 진실은 반대였다. 천훼이는 개 고양이를 끔찍하게 아끼는 쪽이 아니라 특별히 인간과 다른 방법으로 학대하는 쪽이었다. 이를테면 걷어찬다든가.
아무래도 이민호는 쇼핑에 꽂힌 것 같았다. 이끌려서 하버 시티에 갔다. 파이처럼 겹겹이 쌓인 층 사이마다 벌레떼처럼 숍이 들어차 있었다. 인파가 엄청났다. 홍콩 사람, 외국 사람, 파악하기 힘든 사람, 그리고 어른 옷자락도 안 잡고 맘놓고 뛰어다니는 애들이 있었다. 눈에 띌 때마다 보이지 않는 뭔가가 걔들을 훌쩍 데려갈까 봐 머리가 아팠다. 이민호가 갑자기 손을 내밀었다.
“잡아. 힘들면.”
“안 힘들어요.”
“말을 잘못했어. 그냥 잡아.”
넹. 필릭스가 손가락 끝을 손가락 끝으로 붙잡았다.
“얼른 옷만 사고 들어가면 안 돼요?”
“왜?”
“궁금한 게 많아서요. 밖에서는 얘기를 못 하니까.”
필릭스가 작게 입술로 모양을 냈다. 경찰. 그런 거요.
“좀 아까운데. 밖에 나가는 경험이 아쉽지 않았어? 매일.”
“그건 그렇지만.”
“내 친구 중에 웃긴 애가 있어.”
걔 취미는 시끄럽게 판촉하는 길거리 매장을 지날 때마다 큰 소리로 노래 부르기야. 근데 판촉용으로 틀어놓는 곡이랑은 전혀 다른 걸 불러. 그래도 아무도 모른대. 이민호가 천천히 걷다가 모자 판매점 앞에 멈춰섰다. 앞쪽 매대에 나온 걸 구경했다.
“하나도 안 웃겨.”
“중요한 건 유머감각이 아니야. 아무도 모른다는 거지. 그냥 말해. 여기서.”
“네?”
“누가 우리 대화를 들을 거 같아?”
그 순간 뭔가 막아놓은 뚜껑을 연 것처럼 필릭스의 귀로 대형 쇼핑몰의 소음이 밀어닥쳤다. 귀가 터질 것 같았다. 살면서 처음 느껴본 감각이었다. 군중 속의 고독이란 건. 그동안 필릭스의 방에는 군중이 부족했다. 그렇다고 고독이 충분하지도 못했다. 매일 찐득찐득 짜증나게 구는 천 회장이 있었으니까.
“⋯⋯이런 것까지도 경찰 일이에요?”
“음. 모르겠어.”
겨우 그게 끝. 질문이 안 오니까 이민호는 일부러 말을 더하진 않았다. 볼캡을 하나 골라보라고 해서 필릭스가 두 개 중에 고민된다고 했다. 이민호가 전부 샀다. 하나씩 나눠 썼다. 다음, 그 다음. 모든 매장에서 필릭스에게 선택권을 줬다. 심지어 자기 옷을 구입할 때도. 필릭스는 적응이 잘 안 됐다. 자기가 엄청난 권력을 휘두르는 듯한 기분이었다.
새로 찾아간 삼수이포 근처의 호텔에서도 이민호는 방을 두 호실 잡았다. 아직 대낮인데. 잘 자라. 하고 309호로 들어가더니 금세 308호 문을 노크했다.
“밑에 좀 내려가려고 하는데 어울려 줘. 혼자 가기 무서워.”
“아까 형이 말한 노래하는 친구인지 뭔지보다 지금 이게 더 웃겨요.”
“잘됐네. 많이 웃어라.”
이민호가 내려가고 싶다는 곳은 전자상가 거리였다. 별별 듣도 보도 못한 게 가게마다 쌓여 있었다. 경찰끼리의 연락수단은 있을 텐데 뭘 사려는 걸까 했더니 휴대용 게임기를 집었다. 닌텐도 DS비슷하게 생긴 구식 기계였다.
“소프트는 이거 사요.”
답지않게 졸랐다. 이건 또 껍데기가 철권 비슷한 느낌이다. 손님이 아무도 없는 이유가 있었군. 정품만 취급하는 메인 거리 뒷편의 누가 어떻게 만든 건지도 모르겠는 제품의 중고까지도 취급하는 가게였다. 짜가가 판을 쳤다. 넌 그거 해라. 나는 이거면 됐어. 이민호가 고른 건 스도쿠였다. Sudoku. 최고의 두뇌 게임. 입력 제한 없는 메모 기능 제공.
“이걸⋯⋯ 경찰수첩 대용으로 쓰려고요?”
“농담도. 원래 스도쿠는 적어가면서 하는 거야. 니가 고수의 세계를 알겠냐.”
그는 만난 이후로 가장 즐거워 보였다.
새벽에는 308호 쪽이 309호를 찾아갔다. 부스스한 이민호가 묻지도 않고 문 뒤쪽으로 한 걸음 물러나 줬다. 필릭스가 밤에만 나오는 끔찍하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왜 형이 문 열고 나올 때마다 어디서 본 것 같지.”
“감각이 예민해졌을 때 인상이야. 그날 내가 부엌에서 나왔던 게 기억에 남아서 그래.”
“그치만 부엌은 문이 없어요.”
잠꼬대 비슷한 걸 하면서 침대에 눕는 걸 이민호가 가만히 바라봤다.
“원래 남의 침대에 올라올 때는 허락을 구해야 돼.”
“⋯허락 구해요.”
무슨 중고 게임소프트 구해요, 처럼 말을 하네. 그래도 이민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려줘서 고마워요⋯.”
피가 많이 나오는 꿈을 꿔서요. 누가 필요했어요. 찾아갈 수 있는 사람이 있다니. 나는 이쪽이 더 꿈같아요. 필릭스는 곧 깊이 잠들었다. 이민호가 살며시 도로 비어있는 자기 자리에 누웠다. 침대가 흔들리지 않도록.
룸 넘버 l
천훼이에게 수백 명의 아이들을 실어나른 브로커는 다 자라 성인이 된 이민호를 알아채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뭐 담임선생이었던 것도 아니고. 이민호는 꼭대기를 치기 위해 그쪽에서부터 접근했다.
그가 자주 간다는 당구장이 있었다. 근처 다이에서 죽치고 있다가 우연히 어느 대화를 엿듣게 됐다.
“같은 걸 치더라도 공이 손맛이 낫지. 난 네모난 거는 영.”
“이번 주도 고생깨나 하겠네. 천 회장은 한 번 붙잡으면 철야가 기본이잖아.”
“그 영감탱이. 지난번에는 너무 졸려서 패산 모서리 좀 무너뜨렸더니 얼마나 화를 내던지. 새벽 네 시였다고. 그때쯤 되면 든 패가 떡인지 빵인지도 몰라.”
천훼이를 영감탱이라고 부르는 브로커와 흡연실에 둘만 남았을 때 슬쩍 말을 붙였다.
“아까 마작 얘기를 하시던데. 어디 큰 판이라도 있어요?”
“아아. 뭐.”
“싫은데 꼭 끼어야 하는 게임인 듯해서요. 머릿수 채우는 용도로 딴 놈 보내기도 그렇고. 근데 난 마작을 워낙 좋아해서 그런 데마다 불려 다녔어요. 리노. 여기 와서 몇 판만 쳐 줘. 자리 비워야 돼. 오늘 3시간까지는 약속했는데 내가 빠지면 30분만에 엎어지잖아. 하하하⋯. 재밌죠. 내가 인망 얻는 방법이에요.”
상대 표정이 미묘해졌다. 둘은 한참 말없이 담뱃재를 털었다. 먼저 나가려는 이민호를 그가 붙잡았다. 혹시 천훼이라고 압니까.
“글쎄요. 잘.”
“돈 많은 영감님인데. 같이 마작할 사람이 없어서 날 몇 시간이든 며칠이든 붙잡아요. 그 양반은 마작 칠 줄 알면 개든 소든 자기 판에 초대하거든. 괜찮으면 나 대신 가끔 게임이나 해주는 걸로 합시다.”
“좋죠.”
시시한 게임 테이블에서 뭔가 캐낼 작정은 아니었다. 경계도 심할 거다. 이민호의 목적은 단지 제 동료들이 이 잡듯 뒤지고 다니는 동안 천훼이를 확실하게 붙잡아 놓는 거였다.
룸 넘버 411
필릭스는 자꾸 불쑥불쑥 나타났다. 게임기를 가져가더니 똑똑. 봐요 나 벌써 삼단계예요. 똑똑. 이거 봐요 사연승했어요. 똑똑. 이민호는 그냥 제발 내 방에 앉아서 게임을 하라고 부탁했다. 허락 구해요, 대답도 안 들은 필릭스가 침대 위로 뛰어들었다. 엎드린 채 격투게임에 열중했다.
“버튼을 그렇게 세게 누르면 망가질 지도 몰라.”
“상관없잖아요. 내 건데.”
오늘 막 이민호가 선물로 줬다. 필릭스는 뛸 듯이 기뻐했다. 저 짜가 게임기가 뭐라고. 거기다가 같이 보고 산 걸.
“상관이 왜 없어.”
이민호가 바지 밑으로 튀어나온 필릭스의 조그만 발을 주물댔다. 호텔방에서 할 게 없으니까 요즘은 무슨 같은 종 짐승들처럼 서로 몸을 두드려 주거나 했다. 필릭스는 하버 시티에서 샀던 옷을 죄다 늘어놓고 튀어나온 실밥을 잘랐다. 몇 개 되지 않자 옷을 뒤집더니 안에 몽글몽글하게 뭉친 섬유를 구멍이 안 날 정도의 한계까지 깎아내며 놀았다.
“며칠 안 남았으니까. 그 전에 부서져도 괜찮아요.”
“그러지 마. 물건을 소중하게 써.”
아야. 살짝 닿은 꿀밤에 필릭스가 고개를 움츠렸다.
“천훼이, 찾는 사람이 많을 텐데.”
“뭐냐. 갑자기. 뇌세포가 자극당해서 막 뭐가 떠올랐나 봐.”
“장난치지 마요.”
“출국한 걸로 되어 있어. 너랑 같이. 해외여행.”
필릭스가 손가락을 멈춘 채 경악했다. 아저씨 진짜 경찰 맞아요? 그거는. 그거는 경찰이 아니라 경찰이 잡는 쪽이 하는 짓 아니에요?
“경찰은 그러면 안 되지. 이건 그냥 내가 리노로서 위법행위한 거야.”
“그래도 돼요?”
“아니. 안 돼.”
세상에 안 되는 거 엄청 많아. 짜가도 만들면 안 되고. 사람도 죽이면 안 되고. 근데 이 방에 많이도 모여 있네. 이민호가 말했다.
“아아아. 살살 만져요. 발.”
“이래야 시원해.”
“나도 형 발 만질래.”
“싫어. 이상해.”
“왜 그렇게까지 해요?”
“말했잖아, 세게 주물러야 효과가⋯.”
“그거 말고요. 리노로서 했다는 거요. 원래 사건을 맡으면 그래요?”
이민호는 대답하지 못했다.
“내가 배에 실려왔을 때부터 형이 경찰이었으면 좋았는데.”
“⋯⋯.”
“이미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으니까. 그래도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끝냈어요.”
이민호는 필릭스 발을 놓아줬다. 그딴 게 하고싶은 일이라니. 애초에 천훼이가 없었다면 시작되지도 않았을 텐데. 그 누구보다 시간을 뒤틀고 싶은 건 이민호였다. 이민호는 아직 필릭스에게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룸 넘버 l
마작을 하던 넷 중 한 명이 돌아가고 천훼이가 제멋대로 불러낸 사람은 의외의 겉모습을 하고 있었다. 작은 얼굴 안에서 눈만 땡그랗고. 새까만 흑발 때문에 인간미가 덜해 보이는데 웬 잠옷 위에 스웨터를 껴입었다. 겨울방학 맞은 초등학생 같았다.
“처음 보는 형이네.”
“안녕하세요.”
“네. 안녕.”
그 후로는 대화를 한 번도 나눠본 적이 없었다. 마작 실력은 고만고만했고 운도 고만고만. 단지 목소리가 인상적이었다. 이민호는 그를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온몸에 전율이 흘러서 버리지 말아야 할 패를 급하게 밀어냈다. 론. 이민호 점수를 뺏어간 그가 씩 웃었다. 나와. 모두 나와아아아아.
컨테이너 안의 이민호를 구해낸 열쇠나라의 외계인. 그는 아직도 천훼이 옆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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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호는 이제 방을 한 개만 체크인했다. 필릭스가 그걸 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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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워요. 근데 그렇게 느끼면 안 되겠죠. 잘못했으니까.”
날짜를 세던 필릭스가 말했다. 이민호는 어쩐지 서늘해져서 걔를 꼭 안아 줬다. 방을 하나로 고를 때 절대 만지지 않겠다고 약속했는데. 둘 다 잊어버린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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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릭스는 눈을 떴다. 이민호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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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릭스는 어릴 때의 기억이 그다지 분명하지 않았다. 몇 번 고개 흔들고 나니까 초등학교 다닐 나이가, 고등학교 다닐 나이가, 어른이 되어 있었다. 천훼이는 다 크면 발가벗겨서 내쫓을 것처럼 굴더니 필릭스 앞에서만 별 변화가 없었다. 언뜻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 순간 정말로 죽고 싶었다.
희미하게 떠오르는 가장 뚜렷한 느낌은 촉감이었다. 등을 맞는. 아주 길다란, 질긴 무언가로. 상처가 여러 번 겹쳐져 터질 때까지 맞았다. 천훼이가 아끼는 찬장 문을 연 일곱 살 때부터 십오 년째였다. 천훼이는 인간 컨테이너를 찬장이라고 불렀다. 무슨 간식 넣어두는 곳처럼. 그래서 열었을 뿐이다.
부둣가에는 안 데려가는데 바다를 보고 싶다 보고 싶다 졸라서 매달려 간 곳이라 마음도 들떠 있었다. 그때만 해도 천훼이를 진심으로 좋아했다. 나에게 잘해주는 어른이라고 착각했다. 몸이 약해서 상자 안에 있어야 한다는데 뭐. 난들 어쩌나. 일곱 살이 의료에 관해 뭘 알겠어. 필릭스는 사람을 좋아해서 사람 관찰도 좋아했다. 이미 적재해둔 화물에는 다들 관심이 없다는 걸 알았다. 천훼이는 바다 위나 길 위를 더 주시했다. 외부인이 없는지. 모르는 배나 처음 보는 차가 없는지. 그 틈에 아직 새 자물쇠가 달리지 않은 채 컨테이너의 잠금쇠로만 닫혀 있는 새로운 상자를 열었다. 먹을 건 없고 사람이 있었다. 나처럼 배달된 또래 친구들이. 도착했어. 다들 나와아아아. 반가워서 맨 앞줄에 앉은 눈이 커다란 남자애한테 소리쳤다.
이후로 이어지는 기억은 없었다. 아마 머리를 맞았을지도 모른다. 일곱 살이었는데. 젠장. 지금은 광동어에 중국어에 영어, 세 개가 가능한데 그날 일만 없었어도 한 두 개쯤은 더 외국어를 할 수 있을지 몰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충격 때문이야. 필릭스는 가끔 생각하곤 했다. 그래도 문 열기를 잘했어. 나간 아이들은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겠지.
아주아주.
그러면 됐다. 실은 3개 국어로도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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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호는 귀가하지 않았다. 여기가 우리의 집은 아니지만.
룸 넘버⋯
이민호가 없어도 이민호 말대로 착실히 따랐다. 게임기를 챙겨서 체크아웃했다. 피투성이 옷을 넣어둔 쓰레기봉투가 사라졌다. 아마 청소부가 실수로 버린 듯했다. 뭐 상관없다. 증거는 차고 넘쳤다. 필릭스에게 주어진 마지막 날이었다. 어쩌면 경찰이 해야 할 일을 하러 떠난 걸지도 몰라. 이제는 나보다 항구 쪽에 신경쓸 시간이니까. 당연하지. 아침을 먹으러 식당으로 갔다. 아직도 텔레비전 채널을 틀어두는 가게가 있네. 메뉴가 나올 때까지 멍하니 뉴스를 봤다. 아침 뉴스였다. 아직 해가 뜬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 현직 경찰관이 중범죄 사실을 자수해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10일 경무청 등에 따르면 이날 오전 1시경 현직 경무청 소속 경원 A씨는 “사적인 복수심 때문에 담당하던 사건의 피의자를 살해했다”고 자수했다고 밝혀 현재 조사 중에 있습니다. 살해된 피해자 B씨는 장기적인 국제 인신매매 사건의 피의자로 알려져⋯. 」
필릭스는 벌떡 일어섰다.
「 문화계 소식입니다. 여름 관광 성수기를 맞아 홍콩관광청에서는 홍콩 썸머 비바 캠페인을⋯. 」
약속된 시간은 일주일이 아니었다. 리노가 혼자 생각해둔 게 있었던 거다. 자물쇠 여는 건 필릭스의 특기였다. 마지막 마작을 쳤던 곳으로 갔다. 아무것도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한 걸까. 상상이 병증처럼 도졌다. 마작패를 일일이 닦아서 버리고. 바닥을 청소하는 그.
이 날 내가 여기 있었습니다.
통조림을 따다가 손을 다쳐서.
아마 안에 들어있을 거예요. 내 피가.
라고 말하는 그.
거리로 뛰쳐나왔다. 숨이 모자라서 헉헉대는데 이상한 소음이 들렸다. 벙벙한 바지 주머니에 쑤셔넣어둔 전자기기였다. 배터리가 모자라요. 충전하세요. 배터리가 모자라요. 충전하세요. 왜 계속 켜져 있었을까. 윗판을 열자 휴면 상태이던 게임기가 반짝. 켜졌다.
스도쿠 소프트. 8단계였다. 필릭스는 어려워서 아직 풀어본 적 없는. 선택되어 확대된 숫자 옆에는 숫자가 아니라 글자 메모가 적혀 있었다.
f 에게
시간을 돌려줄게
늦게 갚아서 이자가 많다
lee
이건 사적인 복수심이 아니었다.
너 관용이라는 말 모르냐.
그 소리.
外
필릭스는 이전에는 가본 적도 없는 센트럴을 헤맸다. 고층 건물이 즐비해서 그늘 때문에 서늘할 지경이었다. 경찰이 아니라 다른 곳을 찾아갈 생각이었다. 무작정 유명한 언론사 로고가 찍힌 건물 로비로 들어갔다. 휘황찬란한 안내데스크에 사람이 여럿 있었다.
“뭔가 만드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요.”
“무슨 말씀이시죠.”
“PD나 기자요. 감독이요. 아니면,”
데스크 직원은 위험하다고 생각했는지 내선전화를 들어올렸다. 필릭스는 윗옷을 벗었다. 천훼이 말고는 다른 사람 앞에서 보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심지어 리노에게도. 당황한 직원이 신고하겠습니다, 라며 강경하다가 점점 바람 잦아든 수면이 조용해지듯 목소리를 사그라뜨렸다. 필릭스의 몸에는 많은 게 있었다. 사원증을 건 한 남자가 다가왔다. 자켓을 건네왔다.
“들어가서 이야기합시다.”
“관용이 아직 많아요? 그런 게 더 남아 있을까요.”
“⋯⋯그럼요. 세상은 아직 그런 방식으로 돌아가요.”
아직 그런 방식으로. 필릭스는 낯선 이에게 이끌려 건물 안쪽으로 향했다.
눈 커다란 어린이가 또 다른 눈 커다란 어린이를 구하고. 눈 커다란 다 큰 남자가 또 다른 눈 커다란 다 큰 남자를 구했다. 세 번째도 필요했다. 어쩌면 끝없는 고리가. 넘겨받은 삶이 길었다.
리노가 보고 싶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