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 text a postcard sent to you, did it go throug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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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릭스가 눈을 뜬다.
안개가 낀 것처럼 시야가 흐릿했다.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몸은 물먹은 솜 같았다. 팔을 꼼지락거리자 혈관 곳곳에 꽂혀 있는 주삿바늘이 느껴졌다. 마치 못에 박힌 것처럼.
바이탈 사인이 삐ー 소리를 내며 가동을 시작한다. 숨을 들이쉬자 누군가 폐를 쥐어 뜯는 기분이었다.
“메모 확인.”
낮은 음성이 캡슐 안에 울려 퍼졌다. 알람 소리가 나며 캡슐 안쪽 검은 디스플레이에 흰색 문장 하나가 깜박거린다.
너도 알겠지만 수백 년의 냉동상태 후에도 기능을 유지하려면 필릭스 네가 가장 유리해. 미안해. 사랑해.
필릭스가 다시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매뉴얼이 떠오른다. 냉동 캡슐에서 의식이 돌아오면 심호흡을 다섯 번 이상 하세요. 장기간 냉동 상태 후 움직이기 위해서는 최소 다섯 시간 이상, 발 끝부터 머리까지 힘을 천천히 가해야 합니다.
싫어, 어느 세월에. 필릭스가 감고 있던 눈을 부릅떴다. 무릎을 구부려서 발바닥으로 캡슐 천장을 쳤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뚜껑이 한쪽으로 개방됐다. 과호흡이 올 정도로 신선한 산소가 폐로 스며들어왔다. 그 여파로 필릭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상체를 들어 올려 다리를 쭉 뻗고 앉았다. 벗겨진 뚜껑 안쪽, 여전히 문장이 깜박거리고 있는 디스플레이를 쳐다봤다. 이내 차가운 액정에 천천히 입술을 가져갔다. 맞닿았을 때 느껴지는 온기는 오직 필릭스의 것뿐이다. 깜박이는 글자 위로 숨을 불어넣으며 필릭스는 답장으로 보낼 말을 생각했다.
다들 너무해요.
그리고 나도 사랑해요.
Holiday
오늘따라 왜 이렇게 뻑뻑해. 응? 내가 안 아프게 풀어줄게. 어때, 편하지? 천장 텍스가 반쯤 부서져 내린 차고 한편에서 남자가 숨을 헐떡거렸다. 힘을 잔뜩 준 전완근에 핏줄이 솟았다. 한껏 집중한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이 목선을 타고 떨어진다. 후덥지근한 날씨에 소매를 걷어 올렸다. 움직일 때마다 오른팔에 다부지게 자리잡은 상완근의 선이 짙어졌다. 행위가 성공한 듯 남자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잘했어. 넌 최고야. 난 너밖에 없는 거 알지, 어디 아프지 말고 나랑 평생 가자. 우리 같이 자연사⋯.
“형 제발 그런 말 좀 안 하면 안 돼? 미안한데 나도 귓구멍이라는 게 있거든? 다 들리거든?”
미친놈아! 차라리 나가서 진짜 섹스를 해! 공구함에서 니퍼를 들고 가던 지성이 진저리를 쳤다. 민호가 아랑곳하지 않고 벗어놨던 장갑을 다시 꼈다. 앞에 있는 구식 바이크를 두 손으로 감쌌다.
“리빗⋯. 저런 말 듣지 마. 우리의 사랑은 진짜야. 알지?”
아쉽게도 무생물인 리빗은 민호의 사랑에 대답할 수 없었다. 민호가 바닥에 널브러진 공구를 정리했다. 십년을 함께한 바이크의 엔진은 서서히 운명을 달리하고 있었다. 주기적으로 점검을 하는데도 문제가 여기저기 나타났다.
민호가 마지막으로 기름통을 들어 연료를 채웠다. 왼팔로 바이크 그립을 잡고 옮기려는데 손가락이 원하는 만큼 움직이지 않았다. 또다. 감도 불량. 태양풍이 몰아칠 거라더니 연관이 있나. 민호가 바이크를 다시 세워놓고 왼팔에 붙은 기계 의수를 떼어내 접합 부위의 센서를 몇 개 조정했다. 다시 텅 빈 왼팔에 꽂으니 생체 신경들이 자리를 찾아 맞물렸다.
“니퍼는 왜 들고 가? 뭐 고장 났어?”
“기타 줄 다 끊어졌어.”
지성이 일하는 제9구역의 펍에선 이틀 전 쌈박질이 벌어졌다. 싸움도 못하면서 호기롭게 참전했다가 일렉기타 줄 두 개를 끊어먹었다.
‘어쩔 수 없다. 베이시스트로 전향해.’
옆에서 한껏 취한 채 비꼬는 김승민 말에 열이 받아서, 과거에 존재했다던 락스타처럼 기타 파괴 퍼포먼스도 보여줬다. 깽값을 대신 물어준 김승민이 부서진 유리잔들로 가득한 바닥을 쓸쓸하게 쓸었다지.
“그럼 공연은?”
“강제 휴가.”
지성이 선반에 있던 오일도 챙겼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로즈우드 지판에 기름칠도 해줘야지. 근데 저 양반 왜 음흉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걸까?
“휴가면 할 일 없겠네?”
오 쉣.
“갑자기 생긴 것 같기도 하고⋯.”
지성이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오케이 가자. 민호가 단호하게 말했다. 한 손엔 오일 한 손엔 니퍼를 든 지성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민호의 이상한 미소가 더 짙어졌다. 지성이 고개를 도리도리도리 저었다. 형 나 손에 무기 들었다. 가까이 오지 마라 진짜⋯
“나 진짜 기절해. 죽을 것 같다고!!”
“어차피 살날 얼마 안 남았자너.”
30분 뒤 지성은 민호의 바이크 뒤에 앉아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민호가 속력을 더 올렸다. 고글만 쓴 얼굴에 세찬 바람이 그대로 느껴졌다.
숨을 쉴 때마다 텁텁한 모래가 몸 안으로 흘러 들어간다. 평균 수명 29살의 도시. 폐 좀 아껴서 숨 막히게 한두 해 더 사느니 마음껏 들이마시고 제 명에 뒤지는 게 낫지. 스물 넷의 이민호는 그렇게 생각한다. 바이크가 도시의 장애물을 피해 질주했다. 빠른 속도에 누군가 치일뻔했는지 욕지거리가 날라왔다. 죄송합니다아. 민호가 예의 바르게 사과했다. 오늘의 목표는 사하라의 눈. 어젯밤 아이언 스톰이 가져다준 고철 더미를 겟하러 갈 생각이다.
망해가는, 아니 이미 망할 대로 망한 지구의 제 9구역에서 이민호는 대강 살아가고 있다. 다른 아이들처럼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 모르는 이민호는 일주일 전 (아마도)스물 네 번째 생일이었다. 형 늙은 거 축하해. 관리 열심히 하고, 상체 좀 만들어야지. 서창빈이 준 선물은 타이어 두 개로 만든 DIY 벤치프레스. 응 뒤질 때 같이 묻어주라. 민호는 애써 웃어줬다. 김승민이 4구역 과학기지에서 훔쳐 왔다던 날씨 판독기 장치보다는 나았다. 그건 맨날 비 온다고만 알려주더라. 사막에 무슨 비? 하나도 맞는 게 없었다.
어릴 때 잠깐 다닌 9구역 간이학교에서(졸업 전 아이언 스톰으로 부서짐) 지구의 역사도 대충 배운 기억이 있다. 800년 전 있던 핵 전쟁으로 기반 시설이 모두 무너지고 해수면이 상승했으며, 살아남은 인류는 재건 가능한 땅을 찾아 헤맸답니다. 그래서 겨우겨우 찾은 게 이곳 사하라 지역이었다. 온갖 네온사인과 철 덩어리, 시멘트 조각이 뒤섞인 복잡한 도시는 단정의 미학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끊이지 않는 모래 폭풍이 고철 더미를 몰고 오는 사하라는 센트럴을 중심으로 아홉 개의 구역으로 나누어졌다. 오아시스와 방사능 억제 장치로 둘러싸인 1구역부터 병자와 오물이 넘치는 제 9구역까지. 잘린 팔 하나로 무던히도 살고 있는 이민호는 당연히 9구역의 사람이었다.
선물로 받은 날씨 판독기를 보며 민호는 이런 거 훔쳐 와도 안 잘리냐고 물었다. 4구역 과학기지 말단 연구원인 승민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어차피 곧 태양풍 오면 우리 다 죽을 거래. 승민의 말에 정적이 흘렀다. 생일파티 분위기가 갑자기 싸해졌다. 옆에 있던 한지성이 텐션을 바꿔보고자 축하 노래를 불렀지만 기타 조율이 안 돼 있어서 끔찍한 소리가 났다.
그래도 내일은 돌아오기 마련. 이민호는 지구가 멸망해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에서 사과를 전부 따 먹겠다는 주의다. 잦은 말썽을 부리는 왼쪽 의수를 고치기 위해 새로운 센서가 필요했다. 9구역에서는 대부분이 셀프다. 필요하면 만들고 없으면 구하러 간다. 어느새 바이크 속력이 최대치였다. 지성은 뒷자리에서 기절했는지 말이 없었다. 콩알 눈이 그려진 흰 천을 뒤집어쓴 선인장 모양의 날씨 판독기 장치가 바이크 손잡이에 묶인 채 흔들거렸다. 차체를 고정한 민호의 허벅지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제9구역의 경계를 넘어 사하라의 눈에 진입하자 끝없는 모래 지평선 위로 지칠 줄 모르는 태양이 이글거렸다.
“내가 왜엑 소중한 휴일에 우웩,”
민호가 폭풍이 남기고 간 흔적을 뒤지는 동안 지성은 옆에서 열심히 토를 했다. 아주 오래 전 사하라의 대지 위에는 대규모 연구단지가 존재했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아이언 스톰은 종종 쓸만한 고철 더미를 바닥에 흩뿌리고 갔다. 건조한 사막이라 잘 녹슬지도 않았다.
“혼자 가면 심심하니까.”
“못됐다 진짜⋯.”
민호가 모래 위에 쌓인 3미터 정도 되는 고철 더미에서 내려왔다. 쓸만한 센서를 바이크 안장 뒤쪽의 리어 랙에 놓고 고정했다. 폭풍이 휩쓸고 간 사막은 깨진 부품과 모래가 뒤엉켜 아수라장이었다. 정오의 햇빛이 민호의 머리 위에 내려앉았다. 돌아가려고 걸음을 내딛는데 신발이 닿는 면이 딱딱했다.
이상하지, 이곳은 온통 모래뿐인데.
민호가 몸을 숙여 손으로 바닥을 쓸었다. 폭풍으로 인해 움푹 파인 면이 드러났다. 위로 옅게 깔린 모래 아래로 동그랗게 가공된 금속 판이 보였다. 철로 된 손잡이가 붙어있었다. 민호가 조심스레 손잡이를 잡아당기자 판이 열리며 아래로 내려가는 시멘트 계단이 나타났다. 당혹스러움이 얼굴을 가득 채웠다.
이걸 내려가 말아?
민호가 속을 게워낸 지성에게 손짓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지성은 끝이 보이지 않는 출처 모를 입구에 안색이 더 안 좋아졌다. 이게 뭐야? 나도 몰라. 민호와 지성이 서로를 빤히 바라봤다. 마침내 민호가 말 문을 열었다.
“가위바위보 해서 진 사람이⋯. 아 알았어 그런 표정 짓지 마. 내가 먼저 갈게.”
민호가 계단을 성큼성큼 내려갔다. 혹시 앞에 뭐가 튀어나올까 봐 쇠 파이프도 하나 챙겼다. 지성이 뒤에서 몸을 한껏 웅크리며 따라왔다. 손전등이 비추는 곳 말고는 전부 어둠이었다. 무릎이 저릿할 때쯤 아래에서 옅은 빛이 흘러나왔다. 도착한 맨 밑바닥은 사방이 매끈한 벽으로 막혀있었다. 가운데에는 파란 버튼이 있는 네모난 단상이 민호의 허리 높이만큼 올라와 있었다.
“이게 뭘까.”
민호가 버튼을 한 번 보고는 방을 더 확인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벽을 주먹으로 여러 차례 두드려 봤는데 꽤나 무겁고 두꺼운 구조로 지어진 듯했다.
구토로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지성은 눈앞의 파란 버튼을 바라봤다. 음 버튼이네, 버튼이야. 속을 비워냈더니 배고프다는 생각과 함께 무의식적으로 손이 들어 올려졌다. 그런 상황이었다. 눈앞에 버튼이 있고 지성은 손을 들어 올리고, 그런데 잠시 후 삐 소리가 나며 경보가 울리기 시작했다. 어? 지성의 눈이 동그래졌다. 손바닥에 단차 없이 납작해진 버튼의 차가운 질감이 느껴졌다. 내부를 탐색하던 민호가 저벅저벅 지성을 향해 걸어왔다. 너 뭐해? 화난 민호 형은 무섭다. 지성이 뒤로 주춤거리며 걸었다.
“형 내 말 들어봐. 내눈앞에버튼이있었거든?생각해보면버튼은원래누르라고있는거잖아.물론내가지금심신미약이라잘못된선택을한걸수도있어.한번더생각해보는게좋긴했겠지하지만,”
“지성아 미쳤니?”
“그치 내가 왜 눌렀을까⋯?”
경보가 쉴 새 없이 울리더니 두 사람을 둘러싼 벽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방 전체에 진동이 울렸다. 여기서 죽긴 싫은데. 여기서 죽으면 아무도 우리 못 찾을 거 아니야. 형⋯ 만약 내가 죽고 배가 고파지면 나를 먹어도 돼. 그동안 고생 많았어. 지성아 제발 끔찍한 소리 좀 하지 마.
벽이 사라지자 주변이 트이며 새로운 공간이 나타났다. 센트럴에나 있을 법한 온갖 첨단 설비들이 보였다. 방 가운데에 희한하게 생긴 캡슐 침대가 있었다. 뚜껑은 열려 있었다. 사람 한 명은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민호가 주위를 둘러보는데 지성이 옆에서 소리를 지르며 캡슐 아래를 가리켰다.
“형형 저기 사람 같은 거.”
정황상 저 캡슐 같은 곳에서 나와 발을 헛디뎠는지 앞으로 고꾸라진 상태였다. 가까이 다가간 민호가 슬쩍 몸을 돌리니 흐트러진 검은 머리칼 사이로 맨얼굴이 언뜻 보였다. 흉부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게 숨은 쉬고 있었다. 멀리서 지켜보던 지성이 소리를 질렀다.
“으악!! 시체다! 되게 예쁜⋯ 시체!”
“아직 살아있어.”
정말? 지성이 가까이 다가갔다. 감은 눈의 얼굴은 평온해 보였다. 계속 울리던 경보음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민호가 남자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주근깨가 모래처럼 흩뿌려져 있었다. 사하라의 필수품인 고글도, 복면도 한 평생 써본 적 없는 사람처럼. 뜨거운 태양을 온 몸으로 감싸 안은 것처럼.
어쩐지 이 세상과 어울리지 않는 얼굴이다. 민호가 수상한 남자의 몸에 팔을 넣어 일으킨 다음 등에 업었다.
whatsername?
민호는 9구역에서 고물상과 수리점을 크게 했다. 원래 주인이었던 프랑켄슈타인 아저씨가 남들보다 긴 삶을 마치고 마흔아홉 살에 죽자 민호가 고물상을 물려받았다. 아이언 스톰이 찾아오면 사막에서 쓸만한 물건을 가져다가 민호를 찾아온 고객들의 잡다한 기계장치를 수리하는 데 사용했다. 비록 왼쪽 팔은 팔꿈치 아래로 사라졌지만, 손기술로 먹고살고 있는 셈이다.
낮에 데려온 신원불명의 남자는 오후 내내 차고지 매트리스 위에 누워있다가 민호가 상태를 살피러 오자 갑자기 눈을 뜨곤 벌떡 일어났다. 덕분에 서로 부딪힌 이마에 빨간 흔적이 남았다. 아프긴 마찬가지였는지 신원불명의 남자가 민호에게 머리가 돌로 만들어졌냐고 물었다. 첫 만남에 할 소리는 아니었다. 보통 첫 만남에 묻는 건 이런 거니까.
“이름이 뭐야?”
“필릭스.”
이민호가 매트리스 옆 협탁에 있던 총을 필릭스의 벌건 이마에 겨눈다. 필릭스가 큰 눈을 껌뻑였다. 방금 냉동상태에서 깨어나서 지금이 어떤 시대인지는 모르겠으나, 사람들이 꽤나 불친절한 세상임이 분명하다. 통성명에 총을 겨누다니.
“다시 말해봐.”
“필릭스.”
“다시.”
“필릭스필릭스필릭ㅅ,”
험악해진 민호의 분위기에 지성이 손으로 필릭스의 입을 막았다. 시끄러운 소리에 자다 말고 차고지로 내려왔는데 민호 형이 예쁜 남자분께 총을 겨누고 있었다. 이게 뭔 상황이여. 조심스럽게 다가갔는데 남자가 9구역에서는 금기시되는 단어를 마구 내뱉고 있었다.
나는 말하고 싶은뎅. 필릭스가 말랑한 혀를 입 밖으로 내밀었다. 지성의 손바닥 안쪽이 축축해졌다. 뜨악. 지성이 낯선 이의 말랑한 혀에 진저리 치며 바지에 손바닥을 박박 문질렀다. 그 사이 필릭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왜? 내가 필릭스면 안 되는 거야?”
“우리 집은 선지자들 출입 금지야.”
그 지긋지긋한 개새끼들. 민호가 짓씹는 말에 지성이 제발 그만하라는 뜻으로 필릭스를 보며 고개를 마구 저었다.
“야 한지성, 펍에서 기타로 걔네 머리 깼다며, 여기서 한 번 더 보여줘 봐.”
“다른 이름도 있어.”
민호가 눈썹을 찡그렸다. 뭔 헛소리야.
“이용복.”
어딘가 친숙한 작명에 두 사람 다 입을 다물었다. 지성이 용복의 얼굴을 면밀히 살폈다. 같은 인종? 800년 전이었다면 우리 같은 나라에 태어났니? 왜인지 들어 본 이름 같기도 하고.
“나는 이 필릭스 용복. 사하라 연구기지 노아의 방주 프로젝트 책임 연구원이고, 혹시 지금 몇 년도야?”
“800년.”
“800년 전에는?”
지성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전쟁과 방사능으로 과거 세대가 이뤄놓은 모든 것이 부서지고 인류는 그 해를 새로운 1년으로 지정했다. 그전에 대한 기록은 대부분 말소되어 알 길이 없었다.
용복의 신경합성 두뇌가 빠르게 연산하기 시작했다. 동료들이 저를 냉동 캡슐에 밀어 넣은 이유는 명확하다. 이용복은 과학 발전을 위해 설계된 하나뿐인 신인류니까. 용복의 몸은 12%가 기계로 이루어져 있다. 인공 신경회로 합성을 통해 자연 태생보다 뇌 기능을 약 3배 더 사용할 수 있다. 붙어있는 장기는 유전자 조작으로 인간이라면 가지고 있을 결점을 제거했기에 잘 고장 나지도 않는다. 신인류라는 명칭처럼 사람이긴 사람이었다. 적어도 용복은 그렇게 생각한다. 지금처럼 스스로 생각을 하는 걸 보면 말이지.
대화 내용을 종합해보자면 눈앞의 사람들은 핵전쟁이 일어나고 800년 뒤에 태어났고, 노아의 방주 프로젝트는 실패했으며, 지구는⋯. 거의 맛이 간 것 같았다. 연구소 동료들은 당연히 죽었겠지. 용복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지자 민호가 안색을 살피다 총을 내려놨다.
“너 정체가 뭐야? 몇 살이야.”
민호의 말에 용복이 고개를 들었다. 그렇다 해도 의문인 점.
“스물 둘, 내 이름이 이상해?”
“어 개명 신청해라.”
민호는 신경질을 내더니 그대로 총을 두고 나가버렸다. 지성이 눈치를 보다가 슬금슬금 다가왔다. 헤이, 저 형이 뭔가 오해를 해서 그래. 원래 저렇게까지 툴툴거리지는 않는데. 네 이름을 가진 놈들한테 크게 다친 적이 있어서. 9구역은 대부분 필릭스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아. 너 되게 오래 잠들어 있었나 보다.
졸지에 이름마저 뺏겼다. 지성은 몇 마디 더 건네곤 내일 보자며 2층으로 다시 자러 갔고, 민호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용복은 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밤에는 두뇌의 찌꺼기들을 분리수거 하게끔 생체 리듬이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한 시간 간격으로 무수히 많은 장면과 정보가 파도처럼 머리를 휩쓸고 사라졌다. 보통 사람들은 그걸 꿈이라고 불러. 이름 모를 동료가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차고지 매트리스 위에 누웠지만 800년 동안 긴 잠을 잤던 관계로 오늘 밤은 잠들고 싶지 않았다. 말똥말똥 눈을 뜨고 있는데 새벽이 밝아올 때쯤 밖에서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소리가 났다. 웅성거리는 소음이 짙어졌다. 마이크를 사용하는지 날카롭게 찢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사람들의 잠을 깨울만한 데시벨이었다. 용복이 천천히 매트리스에서 일어섰다. 차고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금실이 놓아진 흰색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용복이 뒤를 따라가자 9구역 중심에 있는 광장이 나타났다. 그곳에서 용복은 민호가 필릭스라는 말에 총을 겨눈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곳에서 그 이름을 사용하는 집단은 하나밖에 없었다.
흰옷에 높은 모자를 쓴 남자가 광장에 있는 단상 앞에 올라갔다.
“800년 전 우리의 최초 선지자는 계시를 받았습니다. 멸망의 날이 이르렀을 때 축복의 빛 필릭스가 내려와 우리를 에덴으로 인도할 거라고. 머지않았습니다. 아직 믿음이 없는 이교도를 전도하고 갱생합시다.”
축복의 빛이여 있으라!
Fiat lux felix! 광장에 모인 흰 옷들이 주문을 외쳤다. 시끄러운 함성에 하나 둘 문을 연 9구역의 진짜 주민들이 무표정한 모습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흰옷 무리를 노려보며 문 앞에 침을 뱉는 사람도 있었다. 단상에 서 있는 남자 뒤에 설치된 대리석 천사 조각상은 필릭스의 얼굴과 몹시 닮아 있었다.
“참 지랄이지.”
언제 나왔는지 민호가 뒤에 서 있었다. 나직한 미성이 귀로 흘러들어왔다.
“9구역에서 인기 없는 걸 알고도 저렇게 와. 멋진 얘기만 하고 가지. 세상을 구하고, 우리처럼 불쌍한 것들을 돕고, 낙원으로 나아간다.”
용복은 민호의 눈이 일렁거린다고 느꼈다. 유리 벽처럼, 둘 사이에 놓여 상을 왜곡시키고 초점을 흐리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다.
“너도 저 머저리들 따라가던지. 거긴 필릭스라는 이름을 수만 명은 가지고 있을걸.”
“정말로 내가 그랬으면 좋겠어?”
새벽을 지나 태양이 지평선에 걸쳐있었다. 오렌지빛 하늘 아래 고동색에 가까운 두 눈동자가 마주쳤다. 노려보는 것에 일가견이 있는 이민호는 이번 눈싸움에서 졌다. 괜히 말을 돌렸다.
“주말에 김승민이 올 건데, 걔는 과학기지에서 일하고 4구역에 살거든. 데려가 달라고 해. 거기가 살기 더 편할 거야.”
필릭스는 그저 원인과 결과를 결합해서 짐작할 뿐이다. 잠들어 있는 사이 사하라의 하이브리드 사이보그 대한 이야기가 오랜 세월 동안 암암리에 돌았을 수도 있다는 추측. 소문은 쉼 없이 변질되기 마련이다. 연구소 동료들은 예상이나 했을까. 필릭스가 신이 된 세상을. 민호가 뒤돌아 집을 향했다. 용복이 그 뒤를 따라갔다. 집주인은 2층에 있는 침대로, 신원불명 숙박객은 차고지에 덜렁 놓여있는 매트리스로.
다시 눈을 떴을 땐 건너편의 깨진 창문 너머로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민호가 땀에 젖은 채로 차고 지하실에서 나오고 있는 게 보였다. 자물쇠를 채우고 열쇠를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몸에 딱 붙어 윤곽이 드러나는 검정 반소매 티의 아랫부분을 끌어올려 이마에 흥건한 땀을 닦았다. 용복은 그 모습을 빠안히 쳐다보고 있었다. 시선을 느낀 민호가 티셔츠를 아래로 쭉쭉 당겨 정리했다. ‘상체 운동 열심히 하고.’ 갑자기 서창빈이 준 벤치프레스가 생각나는 건 왜일까.
“민호 안녕.”
“안녕 못하다.”
용복은 이런 대답에 굴하지 않는다.
“민호는 믿어? 선지자라는 사람들이 하는 말. 필릭스라는 신이 나타날 거라고.”
“아니. 그리고 너 스물둘이라며 왜 반말이냐.”
“형 따지자면 릭스는 팔백스물두살이지.”
민호가 미소 지으며 선반 옆 스툴에 다리를 꼬고 앉아있는 한지성을 쳐다봤다. 웅 조용히 하고 있을겡⋯. 지성이 고개를 숙이고 기타 줄을 조이는데 집중했다.
“보여 줄 게 있어.”
용복이 이불을 헤치고 벌떡 일어서더니 민호를 보며 말했다. 뭘 보여주는데⋯. 민호가 시선을 한군데에 두지 못하고 요리조리 굴렸다.
오늘의 발견: 사하라의 신인류는 바지를 벗고 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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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사막을 헤치고 세 사람은 다시 사하라의 눈으로 들어갔다.
민호가 용복을 업어온 구역은 거대한 지하 건물의 초입에 불과했다. 용복은 캡슐이 있던 방의 첨단 설비를 능숙하게 다루더니 이내 안내용 태블릿을 찾아냈다. 직사각형의 얇은 태블릿 PC에 현재 위치와 목적지 경로가 깔끔한 약도로 그려졌다. 심지어 둥둥 떠다니면서 용복을 따라다녔다. 민호가 공중에 떠 있는 안내 로봇을 손가락으로 톡 치자 디스플레이가 찡그린 이모티콘을 띄웠다.
“이게 다⋯.”
한참을 걸어가자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우주선이 하나 보였다. 용복은 멈추지 않았다. 지성과 민호가 광활한 우주 함선에 시선을 빼앗기며 뒤따라갔다. 그 옆에 한 대, 그리고 하나 더, 또 하나 더⋯. 늘어진 우주선을 전부 보는 데만 반나절이 걸렸다. 거대한 우주 함선 열 두 척이 사하라의 눈 지하에 매립되어 있었다.
“폭격을 대비해서 우주 함선은 지하에 건설됐어. 한 척당 3만 명 정도를 태울 수 있는 캐빈이 있고, 테라포밍이 가능한 쌍둥이 행성까지는 플라즈마 엔진으로 1개월, 테라포밍에 필요한 작물과 장비를 갖춘 소형 보급용 우주선이 일곱 척 더 있어.”
“…이거 쓸 수는 있는 거야?”
“내가 얼려지기 전에 거의 완성단계였으니까. 당장이라도 가능해.”
용복이 근처에 있던 매끄러운 함체를 손으로 쓸었다. 과거에 대한 애정이 묻어났다. 민호는 김승민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어차피 곧 태양풍으로 다 죽을 거래. 살아남은 사하라의 도시는 우주선을 개발할 능력이 없었다. 승민은 지하로 도망도 불가능 할 거라고 답했다. 한번 기후변화가 시작되면 모든 게 물에 잠길 거라고. 지구 어디에도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은 없다고.
‘축복의 빛 필릭스가 내려와 우리를 에덴으로 인도할 겁니다!’
여전히 지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우주 함선은 금방이라도 출발할 수 있을 만큼 견고해 보였다.
“이게 네가 냉동된 이유야?”
필릭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민호가 헛웃음을 지었다. 눈앞의 용복은 당연하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800년 전 사람들도 역겨운 건 마찬가지네. 의무는 한쪽으로 몰아넣는 점이. 고작 저 순진해 보이는 애한테 짐을 가득 지우고 인류의 구세주로 만드네 마네⋯.’ 속으로 생각하던 민호는 저가 용복을 너무 빤히 훑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런 생각도 이민호가 할 필요 없는 거였다. 이용복을 이용하면 지구를 버리고 새로운 행성으로 가서 살아갈 수 있다. 거기까지가 이민호가 생각해야 하는 전부였다.
사하라의 눈을 벗어나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민호는 말이 없었다. 지성과 용복이 노아의 방주 프로젝트를 재건하는 방법에 대해 토론하는 걸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ー
“못 믿어. 네가 필릭스나 그 동료 연구원들이었어 봐. 우주선 타고 탈출하면 그만이잖아. 뭐 하러 냉동까지 시키면서 여기 남아있냐고. 뭔가 수상해.”
지성과 민호는 창빈이 선물해 준 벤치프레스에 앉아 곤약을 갈아 만든 국수를 먹고 있었다. 민호가 젓가락을 들었다. 배가 안 고프다고 거절한 용복은 멀찍이 떨어져 차고지 선반에 쌓인 부품을 관찰하고 있었다. 민호는 용복을 관찰했다. 다시 손으로 시선을 옮기자 쇠로 만든 젓가락이 보였다. 끝이 적당히 뾰족했다.
“역시 죽여야,”
“형 제발 스탑.”
지성이 벤치 위에 수직으로 놓인 젓가락을 잡았다.
“형이 젓가락 살인마가 되는 건 보고 싶지 않거든. 일단 멋이 없어. 자꾸 안 먹고 헛소리할 거면 국수 나 줘.”
민호가 그릇을 지성 쪽으로 밀었다. 입맛 없기는 저쪽에 있는 이 필릭스 용복이랑 매한가지였다. 이용복은 자신은 생존에 유리하도록 위 기능이 축소돼 있다고 알려줬다. 사흘 동안 한 끼만 먹어도 살아갈 수 있는 기계 함량 12%의 신인류. 인류를 구하기 위해 냉동됐을 때 본인의 의사가 있긴 했을까. 선지자들처럼 자의식도 없이 세상을 구한다는 허황된 얘기나 늘어놓는 건 끔찍하다.
이민호는 아무 질문도 하지 않았다. 가령 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니 같은. 그런 질문은 사람에게 해당하는 거니까. 이용복은, 아직 잘 모르겠어서.
Stray heart
용복은 여전히 9구역에 있다. 주말에는 김승민이 민호의 집에 방문했다. 양손에 9구역에서는 찾기 힘든 채소랑 과일이 들려있었다. 지성이 승민은 본체도 안 하고 신선한 박스 먼저 반겼다.
“쟤는 누구?”
“릭스용복. 사하라의 눈 지하에 엄청 큰 연구기지 있는 거 알아? 거기서 어⋯ 주웠어.”
자세한 건 직접! 지성이 부엌으로 과일을 자르러 간 사이 한참을 지켜보던 승민이 용복을 차고지 중앙에 있는 철제 테이블에 앉혔다. 주말 내내 질문이 쉼 없이 이어졌다. 간단한 호구조사부터 우주 함선의 발사 시스템 구조에 이르기까지. 일주일 동안 같이 지낸 민호보다 더 많은 정보가 들어왔다. 용복은 머릿속에 차곡차곡 정리된 지식으로 어려운 질문들에 모조리 대답했다. 오히려 같이 일하던 연구소 직원들은 어땠어? 같은 일반적인 질문에는 답할 수 없었다.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다. 떠올려 보려고 해도 누군가 의도적으로 그 부분만 지운 것처럼 흐릿했다.
“나도 지하 연구기지에 데려가 줘.”
승민이 말했다. 수십 대의 우주 함선을 건설하는 건 현재의 기술력으로 불가능하다. 시도하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추진 장치 부분에서 항상 기술 결함이 생겼다. 사하라의 부는 1구역과 센트럴의 고위층 손에 있었다. 멸망이 오면 축복의 빛 필릭스가 와서 저들을 데리고 갈 거라고 믿는 인사들. 4구역 과학기지는 연구 자금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나마 있는 것도 우주로 가는 비행선 제조보다는 센트럴을 위한 방사능 피폭 약화 장치를 만드는데 쓰이곤 했다.
민호의 차고지에는 낡은 지프차 하나랑 바이크 리빗이 있었다. 지프차는 기름을 많이 잡아먹는 탓에 잘 사용하지 않았다. 이전에 지하 연구기지에 쓰러져있던 이용복을 데려오는 도중 맛이 가버려서 수리 중이기도 했다. 같이 가기 싫으면 빌려주든가. 승민의 말에 민호가 눈을 부릅떴다. 나의 리빗을 너 같은 협잡꾼에게 맡길 수는 없다.
민호가 리빗의 차체 오른쪽에 한 명 더 앉을 수 있는 사이드카를 설치했다. 승민이 자연스럽게 사이드카에 앉았다. 사하라의 눈에 가야 하는 인원은 용복까지 세명이었다.
“얘도 앉아야 하잖아. 옆으로 비켜.”
“1인용인데 이거, 용복이가 형 뒤에 타면 되겠네.”
언제부터 용복이? 그리고 누구를 운전기사로 아네. 민호가 바이크 그립을 잡자 용복이 뒤에 앉더니 허리에 팔을 둘렀다. 몸을 꼬옥 밀착하고 턱을 민호의 어깨 위에 올렸다.
“너는 헬멧 써.”
민호가 유일하게 하나 있는 헬멧을 용복에게 넘겨줬다. 흰색 바탕에 위쪽 부분엔 아기자기한 토끼의 눈코입이 그려져 있었다. 용복이 그걸 보고 킥킥 웃었다.
“나는 고글도 없는데.”
“눈 감던가.”
승민이 으어어 하는 사이 민호가 곧장 엑셀을 밟았다. 8기통의 엔진이 시원한 소리를 내며 달려 나갔다. 모래바람이 양옆을 스치며 먼지를 일으켰다. 저번보다 빠른 스피드에 뒷좌석의 용복이 허리를 더 세게 잡았다. 민호는 어쩐지 귀 끝이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팔로 감싸 안은 부분이 신경 쓰였다.
그 뒤로도 민호는 지하 연구기지까지 이용복을 열심히 실어 날랐다. 가끔은 한지성까지 세명, 어쩔 땐 이용복이랑 단 둘이. 9구역에서 가장 큰 수리점을 운영하는 만큼 기계에는 자부심이 있었는데, 지하 연구기지에 있는 설비들은 상상을 뛰어넘는 것들이었다. 핵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평화가 유지됐다면 지금의 인류는 어디까지 도달했을까. 민호가 거대한 우주 함선을 보며 생각했다. 용복은 우주선 발사를 위한 준비를 차곡차곡 마쳐나갔다.
사하라의 눈에 폭풍이 심하게 부는 날엔 지하 연구기지에 갈 수 없었다. 민호는 대부분의 시간을 차고지나 한지성이 일하는 펍에서 보냈다. 어디 갈 곳 없는 용복도 마찬가지였다. 이용복은 생각보다 친화력이 좋았다. 이웃들과도 잘 어울렸다. 펍에서는 누군가 사준 공짜 술을 받았고, 장을 봐 올 때면 출처 모를 재료로 만든 단백질 바라도 하나씩 얻어왔다.
9구역은 출신이 불분명한 낯선 이들의 도시이다. 선지자들의 손이 가장 적게 뻗은 구역이기도 했으나 어딘가 익숙한 얼굴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저기 쟤, 축복의 머시기 조각상같이 생겼네. 왜 선지자들 방송 보면 나오는 조각상 있잖아.”
민호에게 라디오 수리를 맡긴 남자가 용복을 흘끔대며 말했다.
전혀요. 민호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김승민 말대로 태양풍이 다가오고 지구가 곧 멸망할 거라는 소문이 사하라 전체에 알음알음 퍼졌다. 돈 좀 있는 사람들은 벙커를 만들어야 한다며 땅을 파기 시작했다. 이미 멸망한 거나 마찬가지로 사는 사람들은 분노의 시선을 다른 곳에 돌렸다. 선지자들이 포교 활동을 펼치는 곳마다 그 거지 같은 축복은 언제 내려오냐며 싸움이 벌어졌다. 부랴부랴 센트럴 위원회가 도시 곳곳에 설치된 전광판으로 입장을 발표했다.
‘모두 거짓된 사실입니다. 혹여 그렇다 한들 우리는 인류를 믿습니다. 800년 역사는 늘 새로운 곳으로의 이주였지요.’
소득은 없었다. 불안은 계속됐다. 가게에 생필품이 동이 나고 민호에게는 바이크나 통신장치 점검을 맡기는 문의가 쏟아졌다. 센트럴 위원회의 발표가 있고 일주일이 지났다. 어수선한 날이 반복되던 어느 저녁, 도시의 전광판이 다시 한번 방송을 송출했다.
센트럴 위원회 전용 메인 방송 주파수였다. 이상하게도 화면에 나온 건 선지자나 위원회 측 사람이 아니었다. 하늘색 가운을 입은 남자는 자신을 4구역 과학기지의 선임 연구원이라고 소개했다. 남자가 말 문을 열었다. 떠도는 소문은 모두 사실이라는 얘기가 시작이었다. 언제쯤 재해가 시작될 건지에 대한 구체적인 수치가 뒤쪽 배경에 나타났다. 남자의 점점 더 언성이 높아졌다.
‘이주? 지랄하고 자빠졌네. 여러분 일단 태양풍이 도래하면 모든 대지가 물에 잠길 겁니다, 하늘로 도망가는 방법은 있겠네요. 어떻게 가냐구요? 죽어서 저세상으로! 등신들아!’
지성이 일하는 펍의 중앙에도 낡은 벽걸이 텔레비전이 있었다. 바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있던 민호, 용복, 창빈도 깜짝 방송을 보고 있었다. 잠시 후 채널 조정이라는 화면이 표시되더니 지지직거리며 방송이 끊겼다. 북적북적하던 장내에 잠시 정적이 흐르더니 이내 몇 배로 소란스러워졌다. 누군가 펍의 오래된 벽걸이 텔레비전에 맥주잔을 던졌다. 우는 사람과 화내는 사람이 테이블마다 공존했다. 취객 한 명이 실실 웃으며 앞으로 다가오더니 지갑에 있던 돈을 연주를 멈춘 밴드의 돈 통에 전부 털어 넣었다.
거기 프론트맨 Highway to hell, 알지? 애꾸눈인 취객이 윙크를 하자 두 눈을 모두 감은 모양새가 됐다. 지성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코드를 잡았다. 눈으로 펍을 한 바퀴 훑었다. 찾는 사람이 내부에 없었다.
“김승민 연락 돼? 왜 아직 안 왔지.”
창빈이 묻는 그때 펍의 풍경 종이 울리더니 길쭉하고 마른 남자가 들어왔다. 승민이었다. 하이. 공연하고 있는 프론트맨을 향해 승민이 길쭉한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익숙한 사람들이 앉아있는 바 테이블을 향해 걸어갔다.
“왜 그렇게 쳐다봐?”
“왜 이렇게 늦었어. 방금 방송 봤어?”
“응 밖에 전광판에서도 나오던데.”
내가 얘기했었잖아. 태양풍이 오고 있다고.
“아는 사람이야?”
승민이 어깨만 으쓱거렸다. 담담한 제스쳐에 주제는 방송에 나온 종말 D-Day에 대한 걸로 넘어갔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냐는 대화 속에서 용복의 다정한 눈길은 승민의 미세하게 떨리는 손을 담았다.
이틀 후 해당 선임 연구원이 실종됐다는 소문이 돌았다. 센트럴 짓이라는 의혹이 번져나갔다. 의심은 선지자들이 두려워하는 반란의 불씨를 더 밀집되게 만들었다.
ー
“어제는 8구역, 오늘은 6구역⋯ 3구역도 반기를 든 건 의왼데.”
“누가 무엇을 얼마나 가졌느냐는 상대적인 거니까. 탐이 났을 거야.”
용복이 담담히 대답하자 지성이 읽고 있던 신문 위로 눈만 빼꼼 올렸다. 아주 오래전 쟤는 이런 상황이 몇 번이고 반복되는 걸 지켜봤겠지. 지성은 용복을 볼 때마다 어딘가 안쓰러웠다. 왜 이런 생각이 드는지는 모르겠지만.
몇 주간 승민은 과학기지 일이 바쁘다며 통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창빈도 연락이 없었다. 민호만이 9구역에서 묵묵하게 본업을 했다. 차고지에 의뢰받은 바이크가 가득해서 셔터까지 열어두고 작업 중이었다. 용접용 보안 면을 올리자 이마에서 땀이 주르륵 쏟아졌다.
더워. 습관적으로 말을 내뱉으며 민호가 보안 면을 벗었다. 뜨끈한 볼에 바로 차가운 천이 닿았다. 용복이 얼음을 싸맨 천으로 땀이 묻은 민호의 얼굴을 두드리고 있었다. 다른 손으로는 파란색 아이스크림을 빨고 있었다. 필요 없다고 가라고 하기엔… 시원했다. 민호가 별 말 하지 않자 용복의 손이 목선까지 내려왔다.
“고마워 용복아. 덕분에 시원하다. 어이구! 내가 대신 말해버렸네.”
민호가 노려보자 지성이 다시 신문 속으로 얼굴을 숨겼다. 용복이 이번에는 녹아서 흐르고 있는 아이스크림을 민호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이것도 먹어.
이용복은 여전히 수상하다. 그리고 이민호는 단 것도 별로 안 좋아한다. 수상한 인물이 주는 수상한 아이스크림인데 어쩐지 거절할 수 없어 한입 베어 물었다. 상했으면 버리라고 해야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민호 형. 오늘은 사하라 연구기지에 가야 해, 며칠 동안 못 가서 출력 시스템 돌려놓은 게 과부하가 걸릴 수도 있어.”
“누가 니 형인데.”
“지성이는 그렇게 부르던데.”
“너 팔백스물두살이라며.”
“그럼 민호가 나한테 형이라고 해.”
어쩐지 이겨 먹는 것도 불가능했다.
민호가 열린 셔터 너머로 하늘을 바라봤다. 아직은 고요하다. 아이언 스톰이 찾아오는 주기가 빨라지고 있긴 하지만 지금 상태만 유지해 준다면 사하라의 눈 까지는 충분했다. 민호가 렌치 뒤쪽 구멍에 손가락을 넣고 빙빙 돌렸다. 고민할 때의 버릇이다.
“한 시간 뒤에 출발하자. 이것까지만 끝내고.”
용복이 고개를 끄덕였다. 녹고 있는 아이스크림을 입에 마저 넣었다. 입 주변에 파란 게 잔뜩 묻었다. 안 닦아준다. 안 닦아줄 거야. 민호가 속으로 되뇌며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남이 땀 흘리는 건 신경 쓰면서 제 얼굴에 뭐가 묻어있는지는 모르냐고 왜. 결국 탁자 위 바구니에 있던 손수건을 들었다. 이리 오라고 손짓하자 용복이 갸우뚱거리면서 다가왔다. 민호가 용복의 한쪽 볼을 잡고 입가를 약하게 문질렀다.
지프차는 여전히 수리 중이었고 사이드카를 달면 속도가 느려진다. 이번에 지성은 집에 남기로 했다. 민호와 용복은 익숙한 사막을 헤치고 사하라의 지하 연구기지에 도착했다. 용복이 출력시스템을 점검하는 동안 민호는 차고지 지하에서 만들고 있는 회심의 역작에 쓸만한 부품을 찾았다. 사하라의 눈 연구기지에는 지금 과학기술보다 몇 배는 앞선 장비들이 많았다. 아이언 스톰이 가져다주는 고철 더미를 뒤질 때는 얻을 수 없던 수확이었다.
출력시스템이 말을 듣지 않는지 예상보다 소요 시간이 길어졌다. 용복이 시스템 복구를 마쳤을 때는 하늘이 전처럼 고요하지 않았다. 지상으로 나오니 성난 바람이 두사람을 맞이했다.
“폭풍이 잦아들고 출발하는 건?”
“아이언 스톰이 한번 시작되면 며칠 동안 이어질지 몰라. 지금 가는 게 나아.”
민호가 제 뒤에 앉으라고 가리켰다. 용복이 이제는 익숙한 허리를 감쌌다.
한 시간쯤 달렸을 무렵 용복이 무어라 소리쳤다. 귓가를 스치는 바람에 섞여 잘 들리지 않았다. 뭐라고? 민호가 되물으며 뒤를 돌아봤다. 저 멀리 펼쳐져 있어야 할 지평선이 보이지 않았다. 거대하고 넓적한 산 같은 게 하늘과 대지가 만나는 지점을 가로막고 있었다. 여러 개가 섞인 모래 폭풍이 파도처럼 다가오고 있었다. 민호가 신음했다. 앞에는 사막의 도시가 저 멀리 점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가면, 민호가 속력을 올렸다. 용복이 제 허리를 세게 감싸안는 게 느껴졌다. 민호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차체에 모래가 휩쓸려 들어갔는지 엑셀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 순간 바람이 몸을 휘감으며 바이크가 옆으로 미끄러졌다. 투명한 고글이 저 멀리 날아가는 게 보였다. 몸의 일부가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착각이기도 했고 아니기도 했다. 기계의수는 혈관이 도는 진짜 팔은 아니니까. 죽음에 가까울 때 든 생각은 저거 또 언제 고치냐, 정도. 폭풍에 섞인 철판에 긁히면서 생채기가 났는지 여기저기 쓰라렸다. 이민호는 폭풍이 휘몰아치는 대로 끌려갔다. 와중에 몸을 틀어 이용복의 뒤통수를 감싸 안았다. 바람에 몸을 맡기며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ー
누가 온 몸을 인두로 지지고 있는 것 같아.
슬쩍 고개를 들어 본 풍경은 어두웠다. 춥고 뜨거웠다. 뇌까지 녹아버릴 정도의 고열이었다. 여전히 사막인지 입안이 텁텁했다. 시야 한 가운데에 흐릿하게 빛이 들어오는 구멍이 있었다. 사하라의 땅 어딘가에 만들어진 바위 동굴 같았다. 제 발로 여길 기어들어 왔을 것 같진 않았다. 민호가 한참을 눈을 뜨려 애썼다. 곧 동굴 입구가 반쯤 어두워졌다. 역광에 가려진 그림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한쪽 손에는 이민호의 왼쪽 팔을 들고 있었다.
“⋯왜 여기 있어?”
“폭풍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어.”
그걸 묻는 게 아니었다. 폭풍을 뚫고 이민호의 의수를 챙겨올 정도면 사하라의 눈에 있는 연구기지까지 가는 것도 가능할 텐데. 너는 왜.
“왜 여기서 내 뒤치다꺼리나 하고 있냐고. 우주선도 띄울 수 있으면서. 이 세상에 작동법을 아는 게 너밖에 없는데⋯.”
용복이 민호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감쌌다. 열이 펄펄 끓었다. 이민호는 눈앞의 다정함에 왜 인지 짜증이 몰려왔다. 용복의 손목을 잡고 옆으로 밀었다.
“그냥 가라고. 선지자들에게 가. 네 얼굴을 한 조각상이 1구역에 수천 개는 있을 걸. 나였으면 걔네 데리고 쌍둥이 행성으로 가서 왕 노릇 하면서 살 거야.”
“아니, 민호는 그렇게 안 살 걸.”
니가 뭘 안다고⋯. 용복이 다시 이마에 손을 올렸다. 민호는 거부할 힘도 없었다. 뜨거운데 춥고, 졸음이 몰려왔다. 이대로 잠들고 싶었다. 가끔은 전부 그만두고 영영 수마에 빠지고 싶어. 살아남는 건 피곤해. 이 정도면 오래 산 것 같기도 한데. 가물거리는 시선 사이로 용복이 민호의 뺨을 때렸다. 야아⋯. 외치던 소리가 졸음을 타고 작게 수그러들었다. 그러자 용복이 반대쪽 뺨도 때렸다.
“야!!”
너무 아파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미안 민호. 근데 지금 잠들면 안 돼.”
“너 진짜 또라이야.”
“계속 말해. 잠들면 안 돼. 무슨 말이라도 해, 어릴 때 이야기 같은 거.”
“어릴 때⋯. 그냥 개 같았는데.”
그냥 자게 내버려 달라고 하고 싶었다.
“팔은 왜 잘렸어.”
그러나 용복은 이번에도 민호의 잠을 깨운다. 입에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더할 나위 없이 솔직했다. 800년 전 사람들은 모두 이랬을까? 솔직하고, 다정하고, 삶의 목적이 있는 것처럼 살아갔을까. 문득 그곳에 태어나보고 싶었다. 민호의 쉰 목소리가 동굴을 울렸다.
“쓰레기통 뒤지면서 떠돌아다니고 있었는데 1구역 선지자들이 데려갔어. 깨끗한 옷도 주고 먹을 것도 주고. 자비로운 축복의 빛께서 주신 거래. 거기까진 참 좋았는데. 며칠 안 가서 몸에 이것저것 실험 같은 걸 했어. 방사능 피폭이었던 거 같아. 앞에서 먼저 한 친구들의 살이랑 뼈가 분리됐거든. 그다음 대상이 나였어.”
용복이 얘기를 들으며 민호를 제 무릎에 눕히고 가슴께를 천천히 두드렸다. 일정한 박자로, 토닥토닥. 언제는 일어나 있으라면서. 이러면 졸린데. 그럼에도 닿는 온기가 싫지 않았다. 민호가 말을 계속 이어 나갔다.
“밤에 배수구를 기어서 도망쳤어. 왼팔이 부러지고 찢긴 상태로 1구역부터 8구역까지 지나가는데 아무도 도와주지 않더라. 9구역에 겨우 가서 기절했는데, 일어나보니까 왼쪽 팔꿈치 아래가 없었어. 프랑켄⋯ 아니 날 데려갔던 남자 말로는 괴사가 심해서 자를 수밖에 없었대.”
아팠어? 용복이 물었다. 기억도 안 나. 민호가 대답했다.
“이제 네 얘기를 해봐.”
음. 용복이 눈을 굴렸다.
“별 거 없어. 그냥 태어나 보니 이미 신체 나이가 열다섯 살쯤이었어. 그때부터 자라기 시작했고 머릿속엔 온갖 지식이 잔뜩 들어 있었어. 처음에는 생각이라는 걸 스스로 하느라 애 좀 먹었고, 동료들이 많이 도와줬어. 근데 동료들에 대한 기억이 안 나. 그랬다는 사실만 머릿속에 남아있어. 아마 나를 냉동시키면서 전부 삭제한 것 같아. 왜 그랬을까?”
왜 그랬긴. 민호가 입술을 열기 위해 애썼다. 잠긴 목소리가 가까스로 흘러나왔다.
⋯까봐.
“어?”
기억하면 외로울까 봐⋯ 그 말을 마지막으로 민호는 정신을 잃었다. 더는 버틸 수 없는 수마가 몰려왔다. 용복이 제 뺨을 또 치는 것 같았다. 얘 때리는데 맛 들인 거 아니야? 종종 꿈꾸는 것처럼 열감 사이로 흐릿한 시야가 보였다. 어느 때는 용복이 저를 끌어안고 있었고 어느 때는 입술을 마주하고 있었다. 삼켜야 하는데, 하고 용복이 무어라 말했다. 맞닿은 입술 사이로 무언가가 넘어왔다. 어미 새가 아기 새를 먹이는 것처럼 묽은 액체가 흘러들어왔다. 민호는 저항하지 않았다. 할 힘도 없었다. 그저 제 뺨을 어루만지는 용복의 온기만을 느꼈다. 열이 나서 그런 건지 아니면 이용복이 따뜻한 건지.
그것도 아니면 제 마음이 그런 건지.
이용복의 손길은 내리쬐는 햇볕 같아서, 이민호 볼에도 주근깨가 생길 것 같았다.
어쩔 땐 용복이 낮게 허밍하는 소리가 들렸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음이었다. 무슨 노래인지 묻고 싶어. 흐려지는 의식 사이로 이민호가 생각했다.
ー
“⋯그만 때려 제발⋯.”
“형! 대박 일어났다. 용복아아아아아.”
지성이 용복을 부르며 1층으로 내려갔다.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뺨이 얼얼했다. 나쁜 놈들. 환자한테 진짜. 민호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모래가 잔뜩 묻었던 옷은 흰색 반소매로 갈아 입혀져 있었다. 밖이 어두웠다. 민호가 다리를 한 발 한 발 바닥에 착지시켰다.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은 탓에 관절이 삐걱거렸다. 계단을 내려가는 길에 용복과 마주쳤다.
“아직 움직이면 안 돼.”
“그러는 너는.”
“나는 보통 사람보다 몇 배는 강하게 태어났어. 그니까 괜찮아.”
눈 밑은 퀭하고 몸은 누가 봐도 그 전보다 말라 있었다. 여기저기 가라앉지 않은 생채기도 보였다. 하마터면 이용복의 팔목을 잡을 뻔했다. 거짓말, 이라고 말하면서 걔의 부피를 가늠할 뻔했다. 민호의 목울대가 움직이며 울컥하고 넘어오는 충동을 겨우 삼켰다.
용복은 민호를 다시 침실로 데려다줬다. 내일 봐. 짧게 인사했다.
밖이 완전히 어두워졌을 때쯤 지성이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라는 말도 안 했는데 반쯤 방문을 열고는 문틀에 기대어 섰다.
“왜.”
“폭풍이 끝나고 두 사람 찾으러 갔을 때⋯. 형은 끙끙 앓고 있고, 용복이는 겨우 눈만 뜨고 있었어. 3블록 가면 있는 돌팔이 의사 아저씨 말로는 영양실조래.”
입술에 닿던 거친 온기.
“바닥에 프로틴 팩이랑 건조식량 껍데기가 널브러져 있더라. 용복이가 식량을 전부 형한테 먹인 것 같아.”
그리고 이상한 입맞춤.
“아무튼 그렇다고, 잘 자.”
지성이 문을 닫고 나갔다. 민호가 갈라지고 튼 입술을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촉감은 환상이 아니었다.
몸이 찌뿌둥해서 그런지 잠이 오지 않았다. 1층의 차고지로 내려가니 용복은 여느 때처럼 매트리스에 누워 있었다.
“야, 자냐⋯.”
이민호는 구남친처럼 물었다. 안 자. 용복이 대답했다.
“그럼 2층 올라와서 자. 여기 매트리스 오래된 거라서 딱딱해.”
용복은 그다지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다. 이곳도 충분히 편하고 좋았다. 그래서 지성이 2층 방을 같이 쓰자고 했을 때도 거절했었다. 용복이 머뭇거리자 민호가 다가와서 용복을 일으켰다. 2층에는 방이 세 개 있었다. 계단 바로 옆방에서 지성이 고롱고롱 코 고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민호의 방은 반대편에 있었다. 용복이 철제로 된 문의 표면을 쓸었다. 문을 여니 행거에 걸려있는 옷가지가 보였다. 옆의 책상 위에는 조잡한 부품들이 널려있었다. 구석에는 침대가 있었다. 민호가 용복을 거기에 앉혔다. 침대 스프링이 튀며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나가 있을 테니까. 여기서 자.”
“민호는 어디에서 자게?”
“끝 방이 하나 더 있어.”
민호가 방을 나갔다. 용복은 일 분 정도 침대에 걸터앉아 주위를 둘러봤다. 누군가의 흔적이 잔뜩 쌓인 방은 어딘가 포근한 인상을 준다. 책상 위에는 몇 가지 액자가 놓여 있었다. 용복이 낯선 인물이 있는 사진을 집어 들었다. 뾰로통한 표정의 어린 이민호 옆에 얼굴의 절반이 기계 부품으로 되어있는 남자가 웃고 있었다.
용복이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다. 이민호가 말한 끝 방문을 열었다. 뭐야? 맨바닥에 깔개만 하나 깔곤 누울 준비를 하던 민호가 말했다. 환기가 안된 방엔 공기 중의 먼지가 쉴 새 없이 부유하고 있었다. 사방을 둘러싼 철제 선반 위에는 낡은 책과 녹슨 기계가 빼곡했다. 어딜 봐도 누군가의 방 보다는 창고로 쓰이는 곳 같았다.
“나는 여기서 자는 게 편해서⋯ 원래 내 방이었거든. 어릴 때.”
누추한 공간을 의식한 민호가 괜히 덧붙였다. 용복이 다가가더니 민호가 반쯤 들어가 있는 이불을 걷었다. 뭐해. 옆에서 민호가 토끼 눈으로 쳐다봤다. 용복은 스스럼없이 민호의 오른쪽 팔을 가져가더니 제 머리를 위에 올렸다. 이불도 끌어당겼다.
“민호 잘 자.”
그리곤 눈을 감았다. 이민호는 멀뚱멀뚱 있다가 결국 팔을 빼지도 못하고 옆으로 누워서 잤다. 다음날도 용복은 멀쩡한 방을 놔두고 너저분한 창고에서 잤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이럴 바엔⋯.’ 결국 먼저 자기 방으로 가자고 말을 꺼낸 건 이민호다. 그날은 푹신한 침대에서 두 사람이 같이 잠을 청했다.
용복은 평상시 잠이 들면 온갖 장면들이 시냅스 하나하나를 스치고 지나가는 기분이 들곤 했다. 어쩔 땐 끔찍한 환영과 정보가 머릿속을 잠식해서 벌떡 깬 적도 있었다. 그러나 민호의 오른쪽 팔을 베고 잘 때면, 이상하게도 나쁜 꿈을 꾸지 않았다.
민호도 그랬으면 좋겠네. 신인류의 적정 수면시간은 네 시간. 새벽에 깬 용복이 자고 있는 민호를 동이 틀 때까지 바라보며 생각했다.
ー
9구역에서 자경단 역할을 했던 조직, 카라반을 중심으로 민호와 지성의 주변인들도 센트럴을 향한 반기의 물결에 뛰어들었다. 그 덕에 한지성이 일하는 펍은 사람이 텅텅 비었다. 공연해봤자 보는 사람도 없어서 힘 빠진다며 지성이 언더락 잔이나 닦았다. 펍 사장님은 혁명군에 지원했다며 가게를 맡기고 떠났다. 창빈도 마찬가지였다. 지성이 민호를 힐끔거렸다. 같이 가고 싶단 말은 안 했지만 선지자들에 대한 분노가 누구보다 많은 사람인데. 싸움이라고는 하나도 못하는 저와 800년 전에 태어나서 이곳 물정은 모르는 용복을 두고 떠날 수는 없었을 거다.
“어차피 한 달 뒤에 다 죽을 텐데 무슨 전쟁이야.”
말은 항상 저렇게 하지만, 지성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인류의 마지막 싸움이 이어지는 사이 사하라의 눈 지하에 있는 우주 함선들도 출정 준비를 마쳤다. 발사보다 중요한 논의가 아직 남아있었다.
누굴 데리고 가느냐.
용복은 특정한 이유로 노아의 방주에 태울 사람들을 고를 수는 없다는 입장이었고, 민호의 생각은 달랐다.
“선지자 새끼들이랑 같이 우주선에서 한 달? 그냥 여기서 죽는 게 났겠다.”
“나는 사람들을 구하려고 만들어졌어.”
“그래 원대한 목적 있는 삶이라서 좋겠다. 미안한데 내 목적은 편하게 살다가 자연사하는 거라서 그렇게는 못 하겠거든. 장단 맞출 사람 찾아서 떠나든가.”
“⋯민호는 왜 나한테만 그런 식으로 말해?”
이용복은 솔직하다. 나 한 테 만. 이민호는 되게⋯ 긁혔다. 신경도 마음도. 아직 설명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닌데 질문을 받으면 변명만 하게 되잖아. 민호는 차라리 입을 꾹 다물었다. 용복 앤 민호 싸우지망⋯ 옆에 있던 지성이 눈치를 봤다. 용복이 일어나더니 차고 한편에 있던 토끼 헬멧을 챙겼다.
“용복아 지금 나가려고?”
지성이 물었다.
“시뮬레이션 돌려놓은 것 확인해야 해. 같이 안 갈 거면 바이크 빌려줘.”
용복이 민호에게 손을 내밀었다. 진짜로 혼자 가겠다고? 민호가 주머니를 뒤져 바이크 키를 꺼냈다. 키를 건네는 짧은 시간 동안 울분이 이민호를 스치고 지나갔다. 너는 이제 알잖아. 내가 왜 선지자들을 증오하는지, 이 세상이 이민호와 이민호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가혹했는지.
이용복이 아닌 다른 사람이 세상을 구해야 한다고 소리쳤으면 이런 기분은 안 들었을 거다. 그것참 좋네요. 열심히 하세요. 하고 할 일 하러 갔을 거다. 근데 용복에게는 이상하게도 무던해지지 못했다. 못하는 것보다는, 그러고 싶지 않은 거에 가까워서, 민호는 갈피를 전혀 못 잡고 있었다.
민호가 냉랭한 표정으로 차키를 건넸다. 용복이 셔터를 열고 차고 밖으로 나갔다. 지성이 언짢은 표정으로 앉아있는 민호와 열린 셔터를 번갈아 보다가 용복을 따라나섰다.
“찾아올 테니까 화해해.”
민호가 대답이 없자 지성이 한 번 더 말했다. 화해할 거지? 대충 고개를 끄덕 거리는 걸 확인하고 밖으로 나갔다.
얼마 가지 못했을 텐데 거리에 용복이 보이지 않았다. 벌써 리빗을 타고 갔나. 9구역은 다른 구역들과는 달리 계획 없이 마구잡이로 도시가 설계됐다. 큰 거리에 작은 골목들이 흐트러진 거미줄처럼 엉켜있었다. 용복을 찾으러 오 분쯤 배회하고 있을 때 커다란 손이 지성의 뒷덜미를 잡아당겼다. 곧 입을 축축한 흰색 천이 감쌌다. 지성은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21 Guns
한지성은 호강 중이다.
눈앞에 처음 보는 음식들이 의자가 열두개나 들어가는 테이블을 꽉 채우고 있다. 황금 잔에는 딱 봐도 비싸 보이는 술이 가득했다. 실크 소재의 옷은 지성이 몸을 움직일 때마다 기분 좋게 살랑거렸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요.”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는데, 선지자들 선전용 전광판에서 가끔 봤던 고위 사제였다. 지성에게 허리를 굽히고 뒤로 종종거리며 물러났다.
내 친구가 신이라니.
지성이 세 번째 황금 술잔을 들이켰다. 근데 이거 먹어도 되나? 독살 이런 거 아닌가. 거부하기엔 차려진 음식이 너무 맛있었다. 부른 배를 두드리고 있다 보니 용복이 건넛방에서 초상화 작업을 마치고 지성의 옆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방금 들어간 방에는 창문이 있었어. 뒤쪽에 바로 담이 있는데 3미터 정도 돼. 로프를 걸면 오를 수 있을 것 같아.”
용복이 지성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불편한 건 없으시죠? 둘이 밀착해서 얘기를 나누자 다른 사제가 다가와 물었다. 용복이 눈을 접어 웃으며 모든 것이 좋다고 답했다.
일주일 전, 납치당한 지성이 정신을 차렸을 땐 눈앞에 용복이 있었다. 주변은 온통 새하얗고 9구역에서는 맡을 수 없는 좋은 향기가 났다. 지성은 스스로 눈치가 빠른 편이라고 생각한다.
‘음 나는 죽었구나.’
용복이 함께 있는 걸 보니 천국임이 분명하다. 조금 더 자야지. 하고 눈을 감는데 용복이 볼을 잡아당겼다.
“지성아 눈 떠.”
천국인데 왜 통증이 있지? 지성이 마지못해 눈을 떴을 땐 금색 자수가 그려진 흰 옷을 입은 수십명의 사람이 무릎을 꿇고 제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세용? 주위를 살펴보니 지성은 용복과 함께 푹신하고 높은 단상 위에 올라가 있었다.
“필릭스님. 모시는 과정에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 옆의⋯ 누구지. 아무튼 이 땅에 언젠가 내려오실 줄 알았습니다.”
용복이 이름이 이 필릭스 용복인 건 맞는데.
“이제 축복의 빛 필릭스님을 찾았다고 공식발표를 하려 합니다.”
회장에 하프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지성의 취향은 아닌 노래가 울려 퍼졌다. 얼마 전까지 무대에서 하이웨이투헬을 부르고 있었는데. 이건 너무 홀리하다.
센트럴, 선지자들의 둥지에서 일주일을 보내며 지성의 의문은 빠르게 해결됐다. 둥지 곳곳에 설치된 축복의 빛 조각상은 그냥 이용복을 베껴서 조각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책 '초보 선지자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계시록'에는 종말이 다가올 때 축복의 빛 필릭스가 구원의 손길을 통해 선지자를 하늘로 올려보내 준다고 적혀있었다. 지성은 컬러로 인쇄된 동화 그림책을 도망칠 때 챙겨갈 가방에 넣었다. 딱딱한 양장 표지가 냄비 받침으로 딱이었다.
두 사람은 선지자들에게 적당히 맞춰 주다가 사흘 뒤 있을 공식발표 날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도망칠 생각이었다. 부디 그때까지 9구역 어딘가에 있을 민호 형과 어긋나지 않기를.
지성의 바람과는 다르게 이민호는 그 시각 9구역에 있지 않았다. 이미 리빗과 함께 센트럴로 가는 여행을 떠나고 있었다. 용복과 지성이 납치되고 5일 차, 사하라의 눈은 물론이고 인접 구역까지 가서 배회하던 민호는 다시 9구역으로 돌아왔다. 잠을 제대로 못 자서 눈에 핏발이 잔뜩 섰다. 옆에 있던 승민이 조금이라도 진정시키려고 몇 가지 추측을 던졌다가 역풍을 맞았다.
“형이 맨날 젓가락으로 사람 눈알 찌를 생각이나 하고 있는 건 아는데⋯.”
“아는데 뭐.”
“유독 이용복한테만 거리 두고, 근데 또 챙겨주는 건 걔 우선이고. 한마디로 되게 이상해. 일곱 살이 짝사랑하는 것 같았다고.”
“그래서 나 때문에 가출을 했다고 한지성이랑? 리빗도 골목에 버려 두고서?”
“누가 형 때문이래⋯.”
승민은 한숨만 푹푹 쉬다가 다시 4구역으로 돌아갔다. 과학기지에서 가져온(훔친) 추적 장치를 챙겨 민호와 함께 두 사람의 흔적을 찾아보기로 했다. 다음날 나갈 준비를 하는데 누군가 차고 셔터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민호가 아는 사람 중 셔터에도 노크하는 사람은 한 명 밖에 없었다.
“뭐.”
왜 이렇게 늦게 왔냐.라는 뜻이었다. 승민은 급하게 왔는지 허리를 굽히고 헥헥 거리느라 말을 못했다. 민호의 인내심이 사라질 때쯤 승민이 입을 열었다.
“추적할 필요도 없을 것 같은데.”
승민이 구겨진 종이를 펼쳤다. 표지 맨 위에는 센트럴 뉴스 라고 적혀 있었다. 4구역까지만 배부되는 신문이었다. 1면에는 검은 머리에 볼에는 주근깨가 흩뿌려진 미남이 싱긋 웃고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인물 뒤쪽엔 밝은 후광을 묘사했다. 축복의 빛 필릭스의 초상화였다.
<축복의 빛이 내려오다> 필릭스님께서 사흘 뒤 센트럴의 중앙정원에서 친히 모습을 드러내시고 선지자들을 축복하실 예정입니다.
미간이 자연스레 좁혀졌다. 민호가 신문을 구겼다.
“축복은 지랄. 이용복은 애들 납치해서 실험하고 물이랑 식량 독점하는 짓 같은 거 안 해.”
민호는 곧장 리빗에게 향했다. 지금 바로 간다고? 여전히 헐떡이던 승민이 물었다.
“너는 여기 남아서 무슨 일 있으면 알려줘.”
민호가 승민이 가져온 무전기를 주머니에 넣었다. 기름은 꽉 차 있고, 마지막 점검이 좀 오래되긴 했는데 괜찮겠지. 이민호는 쓰지 않을 헬멧도 챙겼다. 새로 나타난 헬멧 주인이 그리운가. 콩알 눈을 가진 토끼 모양 캐릭터가 민호를 빤히 쳐다본다. 신은 가출도 화끈하게 하네. 민호가 바이크 위에 올라탔다. 셔터가 덜그럭거리며 위로 올라갔다.
ー
9구역에서 센트럴까지는 쉬지 않고 꼬박 이틀이 걸렸다. 눈에 띄는 시내를 피해 도시를 둘러싼 사막을 가로질러 바이크를 몰았다. 중간중간 혁명군과 센트럴 군이 대치하고 있어 우회하는 시간이 길었다. 겨우 1구역 외곽까지 진입했지만 센트럴 내부로 들어가는 게 문제였다.
‘서쪽에 혁명군 진영이 있어. 나머지는 센트럴 군이 포위 중이고. 그쪽으로 가서 통로를 찾는 게 나을 거야. 운 좋게 창빈이 형이라도 찾으면 쉽게 들어갈 수도 있고.’
승민의 마지막 무전이 끊겼다. 센트럴에 근접할 수록 도청 불가능한 통신 주파수를 찾는 게 어려웠다. 센트럴은 1구역에 둘러싸여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려면 거대한 성벽을 넘거나 동서남북으로 나 있는 1구역의 문을 지나가야 했다. 성벽을 넘기엔 시간도 장비도 없었다. 서쪽으로 가서 운에 기대보는 수밖에 없었다.
여기 두 번 다시 오게 될 줄은 몰랐는데. 민호가 고글 너머로 보이는 높은 성벽을 눈에 담았다. 따가운 모래가 섞이지 않은 잔잔한 바람이 이민호를 스치고 지나갔다. 지난번 이곳에 왔을 때는 살아남기 위해 도망치는 게 전부였다. 민호가 무의식적으로 왼팔을 약하게 쥐었다. 아프지 않다. 환상통 조차도 사라진 지 오래다. 사막의 모래는 발자국을 기억하지 않는다. 지나 온 길에 파묻혀 살아가는 건 민호의 방식이 아니다. 지금은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제 발로 걸어 들어왔다. 할 일을 행할 뿐이다.
ー
민호가 한가지 간과한 문제가 있었다.
⋯혁명군이 그를 아군으로 인식할지에 대한.
“그니까 형이 왜 여기에 있냐고.”
창살을 앞에 두고 창빈이 작게 속삭였다.
“층비나여기스브니까증말븐갑다.”
나는 안 반갑거든! 창빈이 주변을 살피다가 인기척이 들리자 이민호를 가둬놓은 창살에서 멀어졌다. 서쪽으로 접근한 것 까지는 좋았는데. 암호도 모르고 속해있는 조직도 없고, 무엇보다 이번 혁명에 아직 참여하지 않은 4구역의 무전기까지 들고 있었다.
‘아 김승민이랑 무전 주고받은 거라니까요. 첩자 아니에요. 김승민 몰라요?’
되도 않는 얘기에 혁명군이 이민호에 대해 낸 결론은 ‘첩자로 의심되는 인물’이었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창빈이 누구인지 보러 왔다가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형이 왜 여기서 나와⋯? 창빈이 아는 사람이라고 신원을 보증할 수 있다고 했지만 혁명군에는 혁명군의 룰이 있었다. 적어도 지금 진행 중인 중요한 임무가 끝날 때까지는 안 된다는 답변이었다.
민호가 갇혀있는 동안에도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있었다. 오늘이 두 사람이 중앙정원에 모습을 드러내는 날이었다. 민호가 간수의 시선을 피해 창빈에게 무어라 웅얼거렸지만 입이 테이프로 감싸져 있어서 창빈은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창살에 볼을 부비고 혀로 테이프를 미는 각고의 노력 끝에 민호가 테이프 한쪽을 떨어트렸다. 뺨에 쥐 난 것 같아. 민호가 한 번뿐인 기회를 위해 숨을 들이마셨다.
“얼굴 확인하라고!”
결국 우렁찬 목소리가 혁명군의 간이 감옥을 울렸다. 간수가 돌아오더니 조용히 하라며 창살을 발로 한 대 쳤다. 네 얼굴을 우리가 확인해서 뭐해! 입에 테이프를 세 겹으로 감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감시한다는 명분 하에 멀리서 보고 있던 창빈만 머릿속에 물음표를 띄우다가 이내 간이 감옥 밖으로 나갔다. 간수실에 놓여있는 작은 텔레비전으로 센트럴 생방송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개회식이 시작된 듯 주인공의 얼굴이 화면에 크게 비쳤다. 창빈도 선지자 신문에서 축복의 빛 필릭스를 찾았다는 얘기는 들었다. 신문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근데 저 얼굴은 용복인데. 그것보다 더 확실한 건 화면 귀퉁이에 얼빵한 표정 짓고 있는 쟤는 한지성 아닌가.
창빈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나왔다. 그래 그럴 수 있지. 아니 그러면 안 된다. 왜냐면⋯ 오늘은 혁명군의 센트럴 탈환 작전 첫 번째 날이자,
선지자들의 대표 격인 저 필릭스의 암살 시행 날이기도 했다.
동료들은 이미 중앙정원 근처에 자리를 잡고 있을 거다. 성공할지 실패할지는 모르겠지만 두 사람이 휘말리게 될 건 자명했다. 창빈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계속 흘러나왔다. 간수실에 있는 사람들은 텔레비전에 정신이 빼앗겨 있었다. 창빈이 다시 간이 감옥으로 들어갔다. 말로 설득하는 걸 상상해봤다. 잠깐 탈출 좀 시켜도 될까요? 사유는 우리가 암살하려는 필릭스를 구하기 위해서인데요. 역시 안 되겠지. 간이 감옥 복도에는 간수 한 명이 있었다. 움직일 때마다 허리춤에 권총과 열쇠가 잘그락거렸다. 창빈은 총은 잘 쏠 줄 모른다. 쏘고 싶지도 않고. 그는 이 세상에 몇 남지 않은 우직한 육탄전 선호자로서 간수에게 달려가 목에 초크를 걸었다. 정말 미안해요.
간수가 기절하자 창빈이 벽에 가지런히 기대어 놨다. 모든 걸 지켜본 민호가 손목이 묶인 채 손가락만 움직여 토독토독 작은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창빈은 민호에게도 초크를 걸고 싶었지만 참았다. 간수의 허리에 걸려있던 열쇠를 가져와 쇠창살 문을 열었다. 간수실에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텔레비전에 빨려 들어갈 듯 집중하고 있었다. 민호와 창빈이 등을 벽에 바짝 붙이고 꽃게처럼 슬그머니 빠져나왔다.
창고에서 리빗까지 무사히 빼 온 두 사람은 혁명군이 관리하는 서쪽 정문까지 넘었다. 중앙정원 뒤편엔 낮은 담장이 있고 센트럴에서 인공적으로 만든 숲과 이어져 있었다. 민호가 수풀이 우거진 곳에 리빗을 숨겼다. 행사가 한창 진행 중인 듯 노래와 연설 소리가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용복과 지성이 있는 중앙정원의 탑까지 가기 위해서는 담장을 넘어가야 했다. 주변에 발판으로 쓸만한 건 사람 밖에 없었다. 한 명만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면 그건 이민호여야 했다. 이용복에게 꼭 할 말이 있었으니까.
“나를 저 위로 올려줘.”
“안 돼. 형 그건 너무⋯.”
“알아, 혼자 하기엔 위험한 작전인 거. 니가 내 걱정도 다 하네.”
창빈의 고민하는 표정에 민호는 마음이 찡했다. 죽을 상황 되면 진심이 나온다는데, 그동안 서창빈과 보낸 세월이 헛되지 않았나 보다. 매일매일이 생존게임인 이 거지 같은 세상에서도 믿을 만한 친구가 있는 건 정말,
“아니 형 무겁잖아. 내가 올릴 수 있을까? 그니까 운동을 왜 그렇게 열심히 해가 지고. 하체 단련해서 뭐해 애인도 없고 맨날 바이크만 탈 거면서⋯.”
민호가 입술을 가로로 길게 늘리며 예의 바른 미소를 지었다. 예의 바르지 못한 행동을 할 때 나타나는 표정이었다. 민호가 창빈의 어깨를 잡아 밑으로 내렸다. 왜, 왜. 아 뭐어. 창빈이 툴툴거렸다. 무릎이 아래로 구부러졌다. 민호가 목마를 타듯이 올라탔다. 이제 일어나. 넵. 어깨를 밟는 걸로는 높이가 부족해서 머리까지 밟고 겨우 담을 넘을 수 있었다. 밑에서 작게 돼지라고 외치는 소리가 났지만 가볍게 무시했다.
민호가 담장 위에서 뛰어내려 착지하는 순간, 저 멀리 탑 근처에서 총성이 한 발 울렸다.
ー
“축복의 빛 필릭스님과 어⋯.”
이민호가 중앙정원을 향해 달려가고 있을 때 필릭스는 그의 신도들 앞에 모습을 나타냈다. 개회식이 끝나고 탑 중간의 테라스에서 필릭스가 나타나자 정원에 모인 사람들이 미친 듯이 환호하기 시작했다. 높은 탑 위에서 사람들을 내려다보던 고위 선지자는 그 함성이 자기한테 쏟아지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선지자가 한 손을 들자 좌중이 고요해졌다. 소개할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선지자가 말을 하다 말고 지성을 흘끗 쳐다봤다. 쟨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라는 표정이었다.
“필릭스님이⋯ 생전에 키우던 다람쥐의 환생체입니다.”
“제가요?”
지성의 반문은 박수와 함성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내가 람쥐라니⋯. 기분이 썩 좋지 않은 건 둘째치고 광장의 빽빽한 사람들이 다!람!쥐! 다!람!쥐! 라고 소리치는 모습에 광기가 느껴졌다. 등 뒤로 소름이 바짝 섰다. 대박 미친 사람들. 아까 먹은 비싼 술이 전부 깨고 있었다. 부드러운 비단에 한 땀 한 땀 자수가 놓인 의복이 무겁게 느껴졌다. 기름진 음식에 속이 메슥거렸다. 지성은 9구역의 사람들이 보고 싶어졌다. 민소매에 트렁크 빤스나 입고 차고지에서 민호 형이 쪄준 감자나 먹고 싶었다. 지성이 가만히 있자 뒤에 묵묵히 서 있던 하급 선지자가 지성의 팔을 멋대로 들어 올렸다. 그에 화답하며 환호 소리가 거세졌다. 이 인간 한 대 쳐버릴까. 지성이 순간 고민했다. 용복이 지성의 다른 팔을 감싸며 참으라고 눈짓했다.
그 순간 총알 한 발이 용복의 뺨 바로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주변에 있던 센트럴 군이 용복과 지성을 둘러쌌다. 잠복해있던 혁명군 부대의 게릴라군이 중앙정원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막으라는 소리와 비명이 섞여 들어왔다. 용복이 사태를 확인하려 일어났지만 장막처럼 둘러싼 군인들 때문에 테라스 밖이 보이지 않았다.
“어머나. 바깥에 작은 문제가 생긴 모양입니다. 이제 식사하러 가실까요?”
고위 선지자가 웃으며 용복과 지성을 탑 안으로 안내했다. 총성이 연달아 빗발치는 소리가 들렸다. 촬영할 대상을 잃은 카메라가 흔들거리며 탑 아래를 비췄다. 중앙 정원의 대형 디스플레이에서 팔과 몸통이 꿰뚫린 사람들이 나부끼는 흰 천처럼 스러졌다. 용복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용복이 시야를 가리고 있던 센트럴 군을 비집고 달려갔다. 중앙정원이 내려다 보이는 탑의 테라스에는 방금까지 고위 선지자가 연설하던 단상이 있었다. 용복이 단상 위로 올라가 마이크를 잡고 볼륨을 최대치로 올렸다. 곳곳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귀가 찢어질 듯한 소리가 울렸다. 순간 정적이 찾아왔다.
이럴 땐 내가 정말 신이었으면 좋겠어.
용복이 마이크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싸움을 멈ㅊ,”
그러나 곧바로 고위 선지자의 손짓아래에 두 팔이 붙잡혔다. 센트럴 군이 용복의 양 팔을 잡은 채 질질 끌며 탑 안으로 들어갔다. 정적도 잠시, 아래에서는 또 다른 총구가 서로를 향해 겨눠졌다. 용복을 비추던 거대한 전광판도 총알에 디스플레이가 부서지며 조각들이 아래로 떨어졌다.
소리를 듣고 따라온 민호만이 용복이 사라진 탑의 테라스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ー
“저희의 모든 싸움은 대의를 위해섭니다. 축복의 빛께서도 이해해 주시길.”
말을 하는 와중에도 큰 충격과 함께 탑이 몇 차례 흔들렸다. 고위 선지자는 대수롭지 않게 식사를 이어 나갔다. 넓은 연회장의 벽면을 수놓은 휘장들이 진동에 맞춰 흔들거렸다. 방금까지 호위를 맡던 센트럴 군은 병력 지원 요청으로 외부로 차출됐다. 연회장에는 선지자 몇 명과 눈앞의 스테이크만 바라보고 있는 용복과 지성이 있었다.
“침실로 돌아가고 싶은데요.”
“손도 안 대셨는데, 바깥의 굶주리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음식을 남기는 건 참 아까운 일입니다.”
용복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테이블에 앉아있던 선지자들이 용복을 멀뚱히 쳐다봤다.
“그 굶주림이 누구 때문인데.”
연회장의 모든 눈동자가 용복을 향했다. 지성이 넓은 소매 안에 숨겨놨던 단검을 슬쩍 바깥으로 내밀었다. 여차하면 날릴 생각이었다. 명중률은 장담할 수 없겠지만. 적막 사이로 대치가 이어졌다. 마침내 가장 상석에 있던 고위 선지자가 입을 여는 순간 아주 가까운 곳에서 총성이 들렸다. 천장에 매달려있던 샹들리에 조명이 쿵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주변에 있던 선지자들이 샹들리에와 테이블에 깔아뭉개졌다. 몇 명은 총에 맞았다고 고함을 지르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곧이어 굉음과 함께 용복의 바로 위에 있던 샹들리에 지지대가 끊어졌다. 부드러운 곡선으로 조형된 유리 덩어리가 용복과 지성이 있는 바닥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누군가 달려와 지성을 낙하 범위 밖으로 밀치고 가까이 있던 용복을 낚아채 뒤로 끌어안았다. 파편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유리 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테이블이 엎어지고 벽면의 휘장들이 떨어져 나가며 먼지가 연회장을 가득 채웠다.
용복이 고개를 올려 저를 끌어안은 사람을 바라봤다. 괜찮아? 입 모양으로 민호가 물었다. 자욱한 먼지가 걷히자 반대편에 한지성이 선지자에게 붙잡혀 있는 게 보였다. 지성의 묘한 시선이 느껴졌다. 민호는 여전히 용복을 껴안고 있었다.
딱 봐도 섭섭하다⋯ 저거.
사람이 눈으로도 말을 할 수 있나. 민호는 지성의 삐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구하러 온건 참 고마운데 형. 그렇게 툴툴거리더니, 어~? 나는 피도 눈물도 없이 던져버리고⋯ 우정 보단 사랑이라 이거지⋯.
“가만히 있어! 움직이면 이 다람쥐는 죽는다.”
지성의 목에 스테이크 소스가 묻은 나이프가 겨눠져 있었다. 묘하게 우울해진 지성은 조금 차분해졌다. 사람에게 다람쥐라뇨.
“실례지만 저는 한지성입니다.”
“그니까 다람쥐⋯ 성. 아무튼.”
선지자가 목에 나이프를 가까이 대자 스테이크 소스가 목에 묻었다. 바라보던 민호는 어이가 없을 뿐이다. 빵이나 잘라먹는 칼로 무슨. 평생 고생 안 하고 살아서 그런지 선지자들은 전투에 무능했다. 아쉽게도 가져온 리볼버엔 남아있는 총알이 없었다. 다른 무기를 구해야 했다. 무기는 공중에서 저항을 받지 않을 만큼 길쭉하고, 살을 뚫기에 적당히 뾰족하면 된다.
식탁 위에는 최고의 무기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민호가 용복을 끌어안지 않은 나머지 손으로 젓가락 한 짝을 집었다. 그대로 팔을 뻗어 고위 선지자를 향해 던졌다. 젓가락이 꽂힌 선지자의 목에서 핏줄기가 솟구쳤다. 선지자가 쥐고 있던 나이프가 떨어졌다. 지성이 으악 소리를 내며 옆으로 빠져나왔다. 와다다 뛰어와서는 용복과 민호를 끌어안았다.
“형 최고야. 최고의 젓가락 살인마.”
“민호 최고의 젓가락 살인마!”
“이상한 거 따라 하지 마.”
복도에서 누군가 반란군이 쳐들어온다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용복이 민호의 팔을 끌었다.
“저쪽에 창문이 있는 방이 있어. 넘어가면 뒤쪽에 낮은 담장이 있고, 숲으로 이어지는데⋯.”
이민호가 리빗을 숨겨둔 곳이다. 세 사람은 용복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미리 생각했던 대로 로프를 몸에 감고 창문과 담장을 뛰어넘었다. 먼저 넘어간 민호가 두사람을 차례대로 받아줬다.
사이드카는 안 달고 왔다. 인원은 세명. 고심하던 민호가 용복을 바이크 중간에 태우고 지성에게는 뒤로 돌라고 했다. 끝에 걸터앉아봐. 민호의 말에 지성이 시키는 대로 했다. 용복과 등을 맞대고 앉은 자세였다. 민호가 로프로 두사람의 허리를 꽁꽁 묶었다.
“형⋯ 이러고 간다고?”
지성이 더 물을 새도 없이 앞쪽에 앉은 민호가 엑셀을 밟았다. 바이크의 속도가 금세 빨라졌다. 흐어어어엉 하고 지성이 이상한 소리를 냈다.
“오 선지자시여 저를 구원하사 축복의 빛에 말미암아⋯.”
너는 방금 내가 걔네한테서 구했는데 선지자 기도문을 외우냐? 민호의 말은 지성에게 들리지 않았다. 사이드미러를 보니 쫓아오던 무리가 멀어져 있었다. 인공 숲을 빠져나가니 단단한 사암으로 이루어진 사막의 협곡이 나왔다. 협곡을 빙 돌아서 2구역 외곽까지만 가도 김승민과 무전이 가능할 거다. 속력을 최대치로 높였던 민호가 계속 중얼거리고 있는 지성을 위해 브레이크를 잡았다.
어?
“민호, 앞에 절벽이 있어.”
시력 좋은 용복이 헬멧 안에서 말을 웅얼거렸다. 여러 번 시도해도 브레이크가 먹지 않았다. 바빠서 요즘에 제대로 손을 보지 못했다. 십년 넘게 함께 한 만큼 더 잘 챙겼어야 했는데. 제기랄.
“브레이크가 안 먹어.”
“이 상태로 협곡을 넘으면 반대편 절벽에 부딪힐 거야. 제동이 안된다면 협곡을 넘은 다음 바로 뛰어내려야 해.”
그 말이 의미하는 건,
“리빗이 산산조각 날 거야.”
용복이 덧붙였다. 민호가 떨리는 손으로 그립을 쥐었다. 차선책은 없었다.
리빗이 협곡을 가르며 하늘을 날았다. 10년의 주마등이 민호를 스쳐 지나갔다. 고물상에서 일하며 프랑켄슈타인 아저씨 몰래 훔친 재료들로 직접 설계한 첫 바이크였다. 아이언 스톰이 몰아치던 날에도, 처음으로 사하라의 눈에 도달한 날에도, 죽을 뻔한 모든 고비에 리빗이 있었다. 어쩔 땐 차라리 팔이 잘려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두 발로 리빗을 몰 수 있으니까.
“혀어어어엉어어어어어어어엉”
뒤에서 지성이 지르는 소리가 귀를 따갑게 찔렀다. 감상 좀 빠지려니까 진짜. 용복이 제 허리를 세게 감싸안는 게 느껴졌다. 리빗이 말할 수 있다면 괜찮다고 해주겠지. 이기적일 수 있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부지런히 이민호를 태우고 다니며 어딘가에 정착하길 바라지 않았을까. 바이크를 타고 달리는 이유는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서다. 리빗은 이민호를 이용복에게 데려다 줬다.
공중에 부유하는 짧은 순간이 지나갔다. 대지에 타이어가 마찰하자 민호가 몸을 비틀어 바이크에서 떨어져 나갔다.
사랑했다.
리빗.
굉음과 함께 묵직한 바이크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Boulevard of Broken Dreams
사막의 밤은 영하까지 내려갈 수 있다. 다행히 오늘은 그 정도는 아니었다. 민호가 리빗의 잔해에서 리어랙 아래쪽에 매달아 놨던 모포를 찾아 용복에게 건넸다. 용복은 그걸 바람 빠진 타이어 위에서 웅크리고 자고 있던 지성에게 덮어줬다.
“안 추워?”
“나는⋯.”
“그래 남들보다 강하게 태어났다며.”
용복이 민호의 옆에 앉았다. 엉덩이를 움직여 슬금슬금 다가가더니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고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민호가 입을 떼려고 하자 용복이 선수를 쳤다.
“추운 건 아닌데, 따뜻한 게 좋으니까.”
저 멀리 도시의 경계에서 불빛이 생겨났다가 사그라들기를 반복했다. 한쪽에 연기가 피어나는 걸 봐서는 변압기가 몇 대 터진 것 같았다. 곧 도시에 암전이 찾아왔다. 어둠이 찾아오자 별이 밝게 빛났다.
옆에 찰싹 달라붙은 용복을 의식하지 않으려 민호는 괜히 시답잖은 얘기를 했다. 누가 단백질바 주는 거 받아오지 마, 뭐로 만들어졌을 줄 알고. 네가 어떻게 신이냐, 조각상이랑 너랑 하나도 안 닮았다. 내 왼쪽 의수 껴볼래? 생체 연결 기능이 있어서 너 어깨에도 붙일 수 있어. 그러면 팔이 세 개⋯.
“가라고 할 땐 언제고.”
재잘거리던 민호가 입을 다물었다. 팔짱을 풀고 용복의 어깨를 두 손으로 붙잡았다. 이용복이 저를 보도록 몸을 돌려 세웠다.
“그러는 너는 가란다고 그렇게 가냐. 책임질 것도 있으면서.”
무슨 책임? 용복은 갸우뚱 했고, 민호는 괜히 말했다고 생각하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그⋯ 동굴에서, 800년 전에는 어땠을지 몰라도 여긴 아니거든. 막 입술 가져다 대고, 그거 범죄야 범죄.”
나는 처음이었다고. 민호가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몇 초 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은 용복이 킥킥거리며 웃었다.
“웃기냐?”
“응. 민호 웃겨. 재밌어.”
그렇게 말하면 이민호는 또 할 말이 없었다. 모래가 바람에 휘청거리며 두 사람의 맨 살을 감싸고 지나가길 반복했다. 용복의 몸에 달라붙은 모래가 푸르스름한 달빛에 금처럼 빛났다. 형용사가 머릿속을 침범했다. 가령 예쁘다, 아름답다, 같은. 이민호는 감정적이고 싶지 않다. 이성은 유일한 생존 무기였다. 곧고 뾰족하게 벼려진 쇠처럼 스물네해 동안 열심히 갈았다. 냉소는 부수적으로 따라왔다. 그렇게 해도 무던히 죽어 나가는 게 이민호가 살아가는 세상이었으니까.
근데 일곱살이 짝사랑하는 것 같다고. 이민호가 그렇게 단순해 보인다고. 이용복은 다시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민호의 오른팔을 가져와 깍지까지 꼈다. 깍지를 낀 채로 손이 슬그머니 민호의 가슴 쪽으로 올라갔다.
“민호 120bpm, 가만히 있는데 심장이 빨리 뛰어.”
“기분 탓이야.”
“내 진동센서는 정확해, 어디 아픈 거 아니지?”
이번에는 용복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 같았다. 사막의 신기루가 저녁에도 찾아오나. 귀 끝이 뜨거운 게 느껴졌다. 어둠에 가려졌으니 보이진 않겠지. 민호는 주섬주섬 일어나더니 승민에게 십 분에 한 번씩 무전으로 빨리 오라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동틀 무렵 바닥에 그림자가 지더니 탈탈거리는 소리가 거세졌다. 모래가 세 사람의 얼굴을 휩쓸고 지나갔다. 지성이 헬기를 향해 두 팔을 흔들었다. 까만 선글라스를 낀 김승민이 헬리콥터 입구 옆에 달린 바를 붙잡고 다른 손으로는 경례 제스쳐를 했다.
“설마⋯.”
“과학기지에서 훔쳤어.”
“이젠 아주 막 나가는구나.”
“어차피 감시하는 사람도 없어. 4구역은 혁명군이랑 센트럴 편으로 갈라졌거든. 완전히 망했지.”
비좁은 헬기 안에 리빗의 잔해까지 몽땅 욱여넣었다. 승민이 이미 부서진 건 왜 챙기냐고 물어보려다 옆에서 고개를 열심히 좌우로 흔들고 있는 용복과 지성을 바라보곤 입을 다물었다. 지금 이민호를 건들면 헬기 바깥으로 승민을 밀어버릴지도 모른다.
달달거리는 훔친 헬기를 타고 도시 외곽을 돌아 9구역에 도착했다. 거리는 전보다 더 많이 비어있었다. 사람들은 문을 잠그고 집에 숨거나, 센트럴을 향해 나아가는 길을 택했다. 9구역은 사하라의 눈과 가장 가까운 만큼 폭풍이 몰아치면 피해가 컸다. 아이언 스톰이 몇 차례 휩쓸고 갔는지 민호의 집도 군데군데 패여 있었다. 거대한 고철 덩어리가 지붕 한쪽에 내려앉았다. 민호의 방 쪽이었다. 이용복을 찾으러 가지 않았다면 자다가 비명횡사 했을지도.
어차피 더 부서질 거 재건은 안 하기로 했다. 1층 차고 안으로 들어온 모래와 먼지만 한바탕 치웠다. 민호가 용복의 얼굴에 묻은 가루를 몸소 털어줄 때마다 한지성이 이상한 표정을 짓고 쳐다봤다. 이상한 표정이란 이민호가 자주 짓는 표정이다. 웃음기 머금은 입술을 가로로 만들고, 눈을 갸르스름하게 치켜뜨면서 눈썹이 올라가는. 어딘가 음흉하고 열받는 표정. 어쭈,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제가 만들어낸 결과이므로 민호는 달게 받기로 했다.
ー
“눈 감아, 눈 뜨지 마.”
민호는 몰래 실눈을 떴다. 흐릿한 틈 사이로 익숙한 형체가 보였다. 유선형으로 길게 뻗은 검은 프레임과 카본 소재의 안장 아래로 엔진 라이트가 은은한 파란빛을 내뿜었다. 무엇보다 묵직한 타이어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몸체가 30센티쯤 공중에 떠 있었다. 호버바이크였다. 지성이 하나 둘 셋 하기도 전에 민호가 앞으로 달려갔다. 뭐야 이거?
“리빗에서 나온 엔진이랑 지하 연구기지에 있는 부품을 릭스가 조립했어.”
반중력 센서 미쳤다. 민호가 매끈한 프레임을 손으로 뽀득뽀득 쓸었다. 안장 위에는 아무 기능 없는 익숙한 헬멧이 놓여 있었다. 이제는 이용복 전용이 된 헬멧에는 토끼 모양의 눈코입이 이전과 다름없이 그려져 있었다.
“용복이는?”
“김승민이랑 사하라 연구기지에서 마지막 시스템 점검 중.”
민호가 고글을 착용했다. 호버바이크에 올라타자 안장이 몸을 부드럽게 감쌌다. 늦은 밤 사하라의 연구기지에서 용복을 옆자리에 태우고 돌아왔다. 뒤에서 승민이 달달거리는 지프차를 쓸쓸히 몰았다.
저녁에 네 사람은 차고지 탁자에 모여 처음이자 마지막 회의를 시작했다. 이제 사하라는 4구역 과학기지에서 비공식적으로 발표한 종말의 날에 점점 다가가고 있었다. 우주선이 지상으로 나올 카운트 다운을 정해야 했다.
“한 대에 3만 명씩 열 두 대면 전체 인구의 10%밖에 안 돼. 실시간으로 죽어 나가고 있긴 하지만.”
“그것보다 여기에 테라포밍 가능한 행성으로 갈 수 있는 우주선이 있다는 걸 어떻게 알리게.”
지성의 말에 조용히 설계도를 바라보던 승민이 고개를 들었다.
“그때 펍에서 나오던 방송 기억나? 실종된 4구역 연구원.”
용복이 무의식적으로 승민의 손을 바라봤다. 지금은 떨리고 있지 않았다.
“그때 센트럴 메인 방송 시스템을 해킹하는데 썼던 프로그램이 나한테 있어. 내가 선배를 도왔거든.”
ー
“승민 뭐해.”
“연설 준비.”
용복이 차고지 중간에 놓인 나무 탁자에 팔을 괴고 앉았다.
“뭐 얼마나 거창하게 하려고 준비까지 해.”
민호가 따뜻한 차가 담긴 머그잔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연설문을 보려고 하자 승민이 슬쩍 뒤로 숨겼다.
“비밀이거든.”
“모레면 온 사하라가 알 텐데.”
민호와 용복은 승민에게 죽은 선배 일에 관해 묻지 않았다. 승민이 연설문을 작성하는 내내 차고지 탁자 근처를 맴돌며 시시껄렁한 얘기를 했다. 2층에 있던 지성도 내려와 자기만 빼고 뭐 하냐며 소음에 가세했다. 새벽이 되자 지성과 민호는 낡은 매트리스와 의자에 기대 잠이 들었다. 승민이 다 쓴 연설문을 접어서 주머니에 넣었다. 이틀에 한 번씩만 잠을 보충하면 되는 용복만이 탁자 위에서 승민이 깎아준 팽이를 돌리며 놀고 있었다. 승민이 그런 용복을 흘끗 바라봤다.
“너랑 민호 형 닮았어.”
“어떤 거? 얼굴이?”
“얼굴은⋯ 네가 더 잘생겼고, 그냥 이것저것 닮았어.”
예를 들면, 지금처럼 승민을 혼자 두지 않는 점. 불쑥 떠오르는 생각에 잠식되지 않게 쓸데없는 말을 걸어주는 거. 오아시스는 신기루일 뿐인 사막에서 다정이 건조해지지 않게 가꾸는 게. 승민은 용복을 안드로이드라고 여기진 않지만, 대전제가 깔려 있다면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게 코어가 아닐까 생각했다.
“선배는 집에서 피살됐고 장례식도 센트럴 몰래 치러줬어. 이젠 너 덕분에 약속도 지킬 수 있을 것 같고.”
용복이 다행이네. 하고 대답했다. 팽이 돌리는 걸 멈추고 주위를 둘러봤다. 지성은 용복이 쓰던 낡은 매트리스에 대자로 뻗어 누웠고 민호는 삐걱거리는 의자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바닥에는 깨친 유리창에서 넘어온 모래가 군데군데 쌓여있었다. 용복은 이 차고지의 풍경을 오래도록 기억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거면 충분하다는, 오랜 목적을 이뤘다는 생각이 문득 용복을 스치고 지나갔다. 왜 이런 감정이 드는지는 모를 일이다. 더는 물어볼 동료들도 존재하지 않았으니 영영 모를 일이었다.
이틀 뒤 9구역 광장에 있는 전광판이 켜지며 신호 탐색 표시가 나타났다. 용복과 지성은 광장 근처 벤치에 앉아 옥수수를 튀겨 만든 팝콘까지 꺼내서 와작와작 먹고 있었다. 갑자기 켜진 방송에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집 밖에 나가지 않는 사람들은 창문만 열어서 상태를 살폈다. 구역마다 설치된 전광판을 시작으로 텔레비전, 라디오까지 센트럴의 중앙 방송 시스템과 연결된 모든 통신기기에서 승민의 얼굴과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대담하게 얼굴을 까고 나온 젊은 남자에게 사하라의 시선이 집중됐다. 문을 걸어 잠그고 집 안에 숨어있던 일가족부터 식료품점을 털던 도둑, 대치하고 있던 센트럴 군과 혁명군까지 모든 구역이 그의 첫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아, 마이크 테스트. 안녕하세요. 잘 들리시나여? 김승민입니다⋯.]
승민이 손가락으로 마이크를 톡톡 두드릴 때마다 음향 시스템에서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쟤 뭐하니.”
[저희⋯ 용복이⋯ 아니 필릭스 씨가 800년 전 개발한 우주선이 있는데 지금 완성이 돼서요. 타실 분들은 한 달 동안 먹을 수 있는 식량 들고 9구역 너머에 있는 사하라의 눈으로 오시면 되겠습니다.]
승민이 화면에서 사라졌다. 저게 끝이여? 지성이 말했다. 얘기가 들리기라도 한 듯 승민이 다시 화면에 나타났다. 몸을 기울인 자세로 화면에는 얼굴만 슬쩍 보였다.
[이상입니땨.]
센트럴 군과 혁명군은 잠시 싸움을 멈추고 광장의 거대한 전광판에 나온 김승민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정적을 비집고 누군가 말했다. 무슨 개소리야? 김승민? 어디서 들어봤더라… 웅성거리며 전우를 바라보는 것도 잠시, 센트럴 군 측에서 전투 태세를 알리는 고동 소리가 났다. 다시 서로가 서로의 적을 바라본다. 다시 싸움이 시작된다.
만족스러운 연설을 마친 승민은 과학기지의 감시카메라를 통해 잠시 광장을 바라봤다. 김승민이 심을 사과나무는 다른 곳에 있었다. 할 일이 끝났으니 친구들이 있는 집으로 향할 시간이었다.
한 달 동안 사하라에는 이상한 상황이 지속됐다. 얼마 남지 않은 물자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어느 밤은 혁명군의 승리로 돌아갔고, 어느 날은 센트럴 군이 승리했다. 최종 승리는 혁명군에게 돌아갔지만 사하라 인구의 절반이 사라져 있었다. 그 안에서 또 내부 분열이 시작됐다. 또 다른 싸움이 이어졌다.
태양풍에 전자기기가 망가지고 모래 폭풍이 모든 구역을 한 번씩 휩쓸고 지나갔다. 집 문을 걸어 잠근 사람들이 하나 둘 자물쇠를 풀었다. 싸움에 지친 사람들은 진영에 상관없이 사하라의 눈으로 향했다. 저들끼리 싸우기 시작한 전우들을 뒤로하고 창빈이 사막 행진에 동참했을 땐, 지구를 떠날 사람과 남을 사람이 판가름 나 있었다. 모두가 기피하는 사하라의 눈과 가장 가까운 곳, 제 9구역에서 새로운 행성을 향한 여정이 시작됐다.
“과학기지를 통째로 옮겨 온 거냐.”
김승민 짐을 옮기는 데만 이틀이 걸렸다. 하루 종일 호버바이크를 운전했더니 허리가 저렸다. 과학기지 말단 사원의 이삿짐 박스 하나에는 천으로 감싼 선인장 모양의 날씨 판독기가 무더기로 들어있었다. 민호가 콩알 모양의 눈을 바라보다가 지나가는 아이한테 가지라며 건네줬다. 아이는 마음에 들었는지 꺄르르 웃으며 또래 친구들을 불러왔다. 금세 박스가 비었다.
“저건 날씨도 못 맞추는데 왜 날씨판독기야?”
“너무 뭐라고 하지 마, 선배랑 통신 시스템 뚫는다고 연구비 빼돌려서 그래.”
용복은 4구역 과학기지 사람들과 우주 함선에 탑승할 인원을 나누고 있었다. 사하라의 눈으로 사람들이 쉬지 않고 몰려 들었다. 처음 우주선을 본 사람들은 시야를 꽉 채운 거대함에 눈을 떼지 못했다. 첫 번째 함선에 수용 인원이 가득 찼다. 최초로 쏘아 올려진 우주 함선이 궤도에 무사히 진입했다는 무전을 받았다. 두 번째, 세 번째, 열 한번 째까지 성공적이었다.
보급선까지 모두 올려보내고 나니 마지막 함선만이 남아있었다. 사하라의 눈으로 향하는 물결은 끊겨있었다. 승민이 한 번 더 센트럴 쪽에 방송을 틀었지만 나타나는 사람은 더 이상 없었다.
쌍둥이 행성으로의 이주를 하루 앞두고 민호와 용복은 지하 연구기지를 돌아다녔다. 용복은 잘 떠오르지 않는 기억의 파편을 더듬어 어릴 때 얘기를 해줬다. 여기가 내 방이었던 것 같아. 자주 놀러 오던 동료가 있었는데 기억이 안 나. 반려동물을 키웠던 것 같기도 하고. 역시 이름은 모르겠어. 밥은 인공 배양육 같은 걸 먹었는데 맛은 없었어. 재잘재잘 떠들다가 처음 두사람이 만났던 공간까지 들어왔다. 방 한 가운데에 여전히 캡슐이 놓여 있었다. 800년 동안 용복이 잠들어 있던 곳. 긴 꿈에서 깬 너를 처음 만난 곳. 이 모든 게 시작된 장소. 민호가 그날을 떠올렸다.
용복이 민호의 상념을 깨고 입을 열었다.
“할 말이 있어.”
고백인가? 민호의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입꼬리가 슬슬 올라갔다.
“나는 민호랑 같이 못 가.”
씰룩거리던 입꼬리가 내려왔다. 민호는 세모 모양의 입술을 한 채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잘못 들은 건가. 농담이겠지. 용복이 다시 한번 또박또박 이야기한다.
“나는 민호와 함께 쌍둥이 행성으로 갈 수 없어.”
“무슨 소리야?”
“나는 노아의 방주에 타는 순간 심장이 터져. 프로젝트 연구원들은 전부 심장에 칩이 심어져 있어. 우리가 이사회를 배신하고 도망가지 못하도록.”
‘못 믿어. 네가 필릭스나 그 동료 연구원들이었어 봐. 우주선 타고 탈출하면 그만이잖아. 뭐 하러 냉동까지 시키면서 여기 남아있냐고. 뭔가 수상해.’
“칩을 없애려면 이사회의 승인이 필요한데, 생체인증이야. 지금은 전부 죽었겠지.”
민호가 애써 대답했다. 마른 목에서 소리가 제멋대로 끊겼다.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너는⋯ 똑똑하잖아. 분명, 다른 방법이,”
“프로그램은 최초 추진기를 가동하는 시스템에 입력되어 있어. 그걸 제거하면 우주선의 고도 진입이 불가능해.”
말이 되냐 그게. 민호가 말끝을 흐렸다. 무어라 할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제 와서 이런 건 너무 잔인하잖아. 다들 너에게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용복이 민호의 떨리는 손을 다정하게 잡았다.
“동료들이 나한테 말해줬어.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가벼운 거든 무거운 거든 삶에 목적을 두는 게 중요하다고, 나는 이걸 위해 수백 년을 거쳐 여기에서 다시 숨을 쉬고 있는 거야.”
“다시 방법을 찾아보면⋯.”
“민호는 자연사 할 거라고 했잖아.”
용복이 다정한 말투로 말했다. 민호가 천천히 입을 다물었다.
살아남을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다. 희망은 달콤하다. 잔뜩 취해 본 적조차 없었다. 이용복을 만나고 처음으로 그걸 맛봤다. 가자, 새로운 행성으로, 새로운 삶으로. 고철 폭풍에 소중한 사람들 머리통이 터지는 걸 보지 않아도 된다. 맛대가리 없는 수프를 접시 바닥까지 안 긁어먹어도 돼. 물을 실컷 마시고, 이민호 키보다 깊다는 바다에 가볼 수도 있다. 후대는 스물아홉보다 더 오래 살게 될 거다. 어쩌면 쌍둥이 행성에 도착한 이민호도 요절하지 않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이용복은 본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가까운 사이든 먼 사이든 죽음은 흔해 왔고, 누굴 잃던 결국엔 살아갈 수 있었다. 삶이 비가역적이라는 사실을 잊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으며 모든 게 사실 제자리에 있다고 착각하는 방법도 있다. 낙원이 눈앞에 있었다. 거부는 말도 안 된다. 이민호는 주어진 것만을 믿는 사람이다. 운명도 영혼도 대의도 그와는 거리가 멀다. 복잡한 세상 편하게 살자고 입버릇처럼 중얼거렸다. 이용복은 저와 대척점에 있었다. 복잡한 세상을 편하게 만들려는 사람. 그런 사람은 정작 자신은 편하게 살 수 없다. 지금도. 너는 왜 묵묵히 받아들이고 있니. 어떤 마음이니. 이게 네 운명이야?
많은 생각 중 이민호는 어느 것도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사하라의 눈에서 밤을 보냈다.
다음날 눈을 떴을 땐 용복이 사라져 있었다.
Last Night on Earth
탑승 준비가 완료되고 남은 사람들이 마지막 우주선에 올랐다. 각자 배정된 캐빈으로 들어갔다. 민호가 탈 캐빈은 함선 가장 끝 쪽에 있었다. 이중으로 막힌 문을 열면 바깥쪽으로 나갈 수 있는 비상구가 설치되어 있는 방이었다. 승민은 관제소에서 자동 항로 시스템을 업로드하고 관제소 통로를 통해 다른 캐빈에 탑승할 예정이었다.
“용복이는 왜 안 보여?”
계단을 오르며 지성이 물었다.
“곧 온다고 했어.”
안 올 걸 아는 이민호의 대답이다.
민호가 캐빈으로 들어갔다. 좁은 방 안에는 출발하는 동안 몸이 마구잡이로 날아다니지 않도록 의자에 안전벨트가 달려있었다. 지성이 입술을 물어 뜯으며 민호를 쳐다봤다.
“용복이⋯.”
“곧 온다고 했어. 먼저 앉아있어.”
지성이 한숨을 쉬며 자리에 앉았다. 안전벨트 잠금장치를 당겼다. 민호가 제대로 걸렸는지 확인해주겠다며 가까이 다가갔다. 고개를 숙이는 순간 손에 쥐고 있던 드라이버로 벨트 잠금쇠를 부러트렸다.
“⋯뭐 하세요?”
“고도에 진입하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어. 김승민한테 풀어달라고 해.”
“용복이한테 무슨 일 있지? 맞지? 나도 데려가!”
지성이 발버둥치기 시작했다. 몸을 꽉 조인 벨트가 안정감 있게 지성을 붙들었다. 그 사이 캐빈 내부에 있는 디스플레이가 빨간 숫자로 카운트다운을 알렸다.
“어디 가는데 혼자!”
“에덴으로.”
사람을 낙원으로 삼지 말라는 말이 있던데. 사람은 변하고, 변하는 모든 것은 변질되기 마련이라고. 이민호는 누군가에게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고개를 끄덕였고, 지금은 개소리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이용복을 봤다면 그런 소리 안 나올걸. 민호가 캐빈 바깥 문을 열었다. 어두운 통로를 지나자 끝 쪽에 비상구 표시가 보였다. 문을 여니 익숙한 사막의 빛이 한가득 쏟아졌다.
민호가 아직 자동으로 접히지 않은 계단 위에 발을 올렸다. 비상구 문이 닫히자 안에서 지성이 지르는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얼마 안 가 발사를 알리는 경보가 울리기 시작했다. 무전기로 우주선 컨트롤 타워에 있는 김승민이 무어라 얘기하는 게 들렸지만 무시했다. 민호는 함선 발사 구역을 벗어나서 지상으로 향했다. 삭막한 사막 한가운데 용복이 만들어준 호버바이크 리빗이 민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민호는 여느 때처럼 바이크 위에 올라탔다.
너를 혼자 두지 않을 거야. 네 빈 기억을 채울 거야. 네가 지키려는 사람들 대신에, 내가 너를 지킬 거야.
늘 그랬듯, 다시 전속력으로 모래사막을 지나갈 시간이었다.
ー
이 필릭스 용복은 9구역의 이민호 집 근처 모래 언덕에 앉아있다.
통각을 최소화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필릭스는 그러지 않았다. 아픈 게 좋은 건 아니지만, 고통은 살아있다는 감각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죽으려면 살아 있어야 하니까. 빛이 있어야 어두움이 찾아올 수 있는 것처럼.
폭풍전야라고, 태양풍이 몰려오기 전 하늘은 고요했다. 완벽한 적막이었다. 필릭스가 낮은 목소리로 허밍했다. 신경합성 두뇌라도 모든 걸 기억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이 코드는 뭘까. 800년 전 이 노래를 누가 나에게 알려줬을까. 문득 든 생각이다. 동료 중 한 명이 필릭스에게 상상이 풍부하다고 말해준 사실이 머릿속에 남아있다. 엉뚱한 짓을 하는 게 집에 키웠던 고양이 같다고도 말했다. 그는 누구였을까. 눈이 예쁘고, 코에 점이 있었던 것 같아. 바깥 풍경을 계속 바라보고 있으니 눈이 감겼다. 이대로 일주일이 지나면 지구상에 인류는 사라진다. 임무 완료다. 애초에 나는 노아의 방주 프로젝트를 완성하기 위해 태어났어. 배양됐다고 하는 게 더 적합하겠지. 성공적인 인생이었어. 별점을 매긴다면 완전 파이브스타. 밤이 고요해짐에 따라 필릭스의 허밍 소리가 잦아들었다.
조금.
아주 조금 외로웠다.
생명체가 살아남기 힘든 사막에는 풀벌레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정적을 뚫고 어디선가 덜그럭 거리는 소리가 났다. 모래 언덕 위에 앉아있던 필릭스가 앞을 쳐다봤다. 깜깜한 시야 너머로 사람 머리가 나타났다. 다부진 어깨와 상반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지막으로 필릭스가 좋아하는 두터운 허벅지가 언덕을 힘차게 올라오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왔을 땐 얼굴에 붙는 모래 때문에 미간을 살짝 찌푸린 표정이었다.
“내가 돌아올 확률은 몇 퍼센트였어?”
“0 퍼센트.”
“내가 돌아왔을 때 우리가 살아남을 확률은?”
“음⋯ 17 퍼센트.”
“그것보다 더 많을걸. 동반 자살하러 온 건 아니라서.”
민호가 쪼그려 있던 용복의 팔을 잡고 일으켰다. 용복은 일어난 채로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툭, 툭. 모래 위로 물방울이 하나 둘 떨어졌다. 비가 오나. 날씨판독기가 드디어 한번 맞췄나. 민호가 용복을 끌어안고 등을 약하게 토닥였다. 들썩이던 어깨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용복이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슬픔보단 분노가. 연민보단 증오가 가득한 사막에서, 우는 사람을 본 게 참 오랜만이라 민호는 축축해진 용복의 눈가를 벅벅 문질렀다. 어색한 위로의 방식이었다. 물먹은 주근깨가 떨어져 버리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대로 있었다.
민호가 따뜻한 오른손으로 용복의 뺨을 감쌌다. 흐린 달빛에 의지한 채,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고 있음을 알았다. 코가 부딪히지 않게 고개를 살짝 비틀었다. 더운 숨 사이로 말랑한 혀가 오갔다. 아무도 거부하지 않았다. 원래 이래야 했던 것처럼 자연스러운 입맞춤이었다.
민호가 옅게 실눈을 떴다. 이용복이 제 앞에 있다는 걸 확인하고 싶어서. 다시 용복을 꼭 끌어안으며 민호는 800년 전 이용복의 기억을 지우기로 선택한 얼굴도 모르는 동료들을 떠올렸다. 이용복을 많이 아꼈음이 분명하다. 기억이 있었다면, 이용복이 너무나 외로워했을 걸 예측한 걸 보니. 이민호는 여전히 운명을 믿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도 만약 그런 게 존재한다면, 지금 이곳에서 이용복과 함께 있는 게 이민호의 운명인 것 같았다.
ー
우주선은 모든 엔지니어의 마지막 목표다. 이민호에게 고물상을 물려준 프랑켄슈타인도 다른 사람들 모르게 한 평생 우주선 개발에 몰두했다. 죽고 나서 유서에 적힌 걸 보고서야 알았다. 평생의 숙원을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지하실로 들어가는 열쇠가 봉투 안에 넣어져 있었다. 오랜 기간 고물상을 운영하는 것 이상으로 항상 많은 부품이 필요했다. 쉬는 날 없이 아이언 스톰을 쫓아 사하라의 눈을 찾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노아의 방주가 이용복을 거부한다면 이민호의 방주를 태우면 된다. 이민호의 목표는 언제나 자연사, 지금은 with 이용복.
민호는 용복을 데리고 차고에 있는 지하로 향했다. 자물쇠를 따자 밑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타났다. 용복을 처음 봤던 날처럼 좁고 어두운 계단이었다. 끝까지 내려가자 지하 연구기지에 있는 것보다는 훨씬 작지만 구색은 낸 우주선이 나타났다. 오래되어 닦이지 않는 펜 자국이 묻어 있는 화이트보드엔 수식이 너저분하게 적혀있었다. 계단 바로 옆에 놓인 탁자에는 돌돌 말린 설계도면이 가득했다.
“조종칸이 하나이긴 한데 끼워타면 두 명은 거뜬해. 시험 발사는 해본 적 없어서 성공할지는 모르겠는데. 어차피 이것 말고는 방법이 없으니까.”
민호가 조심스럽게 설계도를 보여줬다. 용복은 말이 없었다. 감동해서 그런가. 귀 끝이 붉어졌다.
“민호⋯ 이건 정말⋯.”
대부분 말들은 쉽게 넘길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진심 어린 칭찬에는 면역이 없었다. 이민호는 귀 끝이 새빨개진 채 ‘대단하다.’라는 말에 별 거 아니라고 답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엉터리⋯.”
응?
“몇 개는 단위도 왔다 갔다 하고, 시스템 구성도 조금 구식⋯ 아니 아날로그 하다. 추진기 부분이 문제 같은데 사하라 지하 연구기지에 남아있는 거로 대체할 수 있겠어.”
용복이 책상 위에 있던 빨간 볼펜으로 설계도에 수정할 부분을 표시했다. 예전 간이학교에서 본 시험 성적표보다 틀림 체크가 더 많았다. 용복이 볼펜으로 죽죽 그을 때마다 이민호의 심장에도 빨간 스크래치가 났다.
한 달이면 도착할 수 있는 노아의 방주와는 달리 민호의 역작은 쌍둥이 행성까지 6개월 정도 소요됐다. 두 사람은 9구역의 빈 거리를 돌아다니며 아무도 없는 상점에서 건조식량을 잔뜩 챙겼다.
떠나기 1시간 전, 민호는 마지막으로 책상 위에 놓인 액자를 가방에 넣었다. 용복이 오고 액자가 더 늘었다. 지성이 언제 죽을지 모르니 사진이라도 많이 남겨놔야 한다고 필름 카메라 셔터를 여기저기 누르고 다녔기 때문이다. 짐가방이 금세 가득 찼다.
“너는? 더 챙길 것 있어?”
민호가 물었다. 아무것도. 용복이 대답했다. 두고 갈 것만 많았다. 800년 전 동료들이 지금의 용복을 본다면 무슨 말을 할까. 적어도 미안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에 대한 구체적인 감정은 남아있지 않지만 머릿속의 절제된 기억은 동료들과 함께한 스물두 해가 많이 행복했었다고 알려주고 있었다. 영원히 무엇을 그리워할지 모르고 그리워하겠지만, 그게 헛된 것만은 아니라고 대답해 주고 싶었다.
지구에서의 마지막 밤이 찾아왔다.
민호가 지하실 천장 개방 버튼을 누른다. 프랑켄슈타인 씨가 30년 전 차고지 지하를 건설한 뒤로 처음 눌린 버튼이었다. 아이언 스톰이 가져다준 서로 다른 규격의 톱니바퀴가 맞물리며 우주선을 지상으로 끌어올렸다.
민호가 먼저 탑승구 계단에 올라 용복에게 손을 내밀었다. 두 사람이 조종칸에 나란히 앉았다. 민호가 프로그램을 가동한다. 조종대 전면에 있는 관측 패널로 저 멀리 모래 폭풍이 사방에서 밀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주변엔 짙은 어둠이 깔려있었다. 발사를 알리는 숫자가 줄어드는 걸 보며 용복이 민호를 바라봤다. 좁은 조종칸 때문에 밀착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고개를 돌리니 서로의 숨소리가 느껴졌다. 용복이 눈을 감았다. 두 사람의 온기가 겹쳐졌다. 짧게 입을 맞췄다. 입술은 따뜻한 거구나. 용복이 생각했다.
“우리는 이 행성에서 키스한 마지막 연인이야.”
어느새 뺨이 잔뜩 상기된 민호가 나지막이 말했다. 우리 벌써 연인? 용복의 데이터에 한 가지 정보가 더 쌓였다. 입술을 맞추면 책임을 질 것.
우주선의 시스템이 모두 활성화됐다. 알람이 울리면서 카운트다운이 시작된다. 10⋯ 9⋯
8
7
6
5
4
3
2
1!
민호와 용복은 중력을 벗어난다. 몸이 붕 뜨는 느낌이 이질적이다. 카르만 라인을 지난 지금 저울로 두 사람의 무게를 잰다면 0 킬로그램. 창백한 푸른 점 위로 몸 보다 가벼운 마음이 둥실둥실, 마하의 속도로 달려 나가고 있었다.
Fi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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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ー293,095
반대 1표 찬성 6표.
“어차피 정해져 있는 거 이딴 투표는 왜 하는데.”
빈정거리는 말에 연구원들은 아무 대답도 없었다. 리더가 밖으로 나가며 리노의 어깨를 다정하게 쓸었다. 모두 회의실에서 나가자 리노 혼자 남았다.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고개를 숙였다. 지하도 안전하지 않다더니 바닥이 수차례 흔들렸다. 머지않아 이곳도 방사능으로 오염될 것이다. 한참 후 뗀 손바닥엔 물기가 어려 있었다.
밖으로 나가니 모두가 필릭스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따뜻한 포옹을 좋아하는 애였다. 멀리 떨어져 있는 리노를 보고는 반갑게 웃었다. 리노가 필릭스와 포옹하면 모든 인사가 끝난다. 리노가 아주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속도 모르고 필릭스가 뛰어오더니 와락 안겼다. 그게 끝이었다. 리노는 준비한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예비전력 예측 결과 수백 년 동안 운전을 위해서는 냉동 캡슐 한 대만 가동할 수 있었다. 선택받은 필릭스가 캡슐에 누워 동맥에 주삿바늘이 꽂히고 머리에 붙인 센서가 필요한 정보를 주입하고 있을 때야 겨우 말이 나왔다.
“내가 널 지켜줄 수 있으면 좋겠어.”
코마에 빠진 상대 앞에서 혼잣말이나 내뱉는 게 한심하게 느껴졌다. 언제 깨어날 지 모르는 필릭스는 리노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캡슐 뚜껑 안쪽에 붙은 검정 디스플레이에는 동료들이 고심해서 고른 문장이 적혀 있었다. 감정적이지도, 솔직하지도 못한 단출한 문장이.
너도 알겠지만 수백 년의 냉동상태 후에도 기능을 유지하려면 필릭스 네가 가장 유리해. 미안해.
리노가 텍스트 앞에서 머뭇거렸다. 뭐해? 이제 가자. 연구실 밖에서 동료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리노는 한참 더 디스플레이 앞에 서 있었다. 이내 몸을 숙여 필릭스에게 입을 맞췄다. 평소보다 조금 차가웠다. 아니 실은 많이.
리노, 정말로 가야 해.
문 앞으로 찾아온 동료에게 리노가 고개를 끄덕였다. 리노가 떠나간 자리에는 한 단어를 더 붙인 문장이 디스플레이 위에서 깜박이고 있었다.
미안해, 주저함의 띄어쓰기 세 번, 그리고 리노의 이번 삶엔 영영 전하지 못할 말,
사랑해.
ー
Sending all my love to you
